[문화스케치] 통일전망대를 찾아...“쟤들도 우리가 보이는 걸까, 손 한번 흔들어 볼까?”
[문화스케치] 통일전망대를 찾아...“쟤들도 우리가 보이는 걸까, 손 한번 흔들어 볼까?”
  • 신현지 기자
  • 승인 2018.09.0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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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임진강 건너 북한 마을의 모습 (사진=신현지 기자)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건너 북한 마을의 모습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2018년 최대 이슈 중 하나를 꼽는다면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라 할수 있겠다. 

1차(2000년 김대중 대통령), 2차(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회담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이루어진 이날의 3차 남북정상회담은 외신 취재단 규모만도 총 36개국 184개 매체(869명)가 모여 전 세계가 한반도를 주목했다.

특히 ‘판문점 선언’ 에 이어 ‘2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는 그동안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국민의 시각이 조심스럽게나마 완화되며 앞으로의 남북관계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통일전망대 4층 라운지의 망원경을 통해 본 북한 마을 (사진=신현지 기자)
통일전망대 4층 라운지의 망원경을 통해 본 북한 마을 (사진=신현지 기자)

이와 관련하여 본지는 현재의 남북의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았다. 서울에서 약 1시간 남짓의 탄현면 성동리의 오두산 통일전망대.

이곳 관계자에 따르면 1992년 개관한 오두산통일전망대는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분단과 통일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약 1,900만 명이 다녀갔다.

자유로는 한산했다. 태풍 솔릭이 물러간 하늘은 평소 볼 수 없는 투명한 빛이었고. 북쪽에 가까울수록 짙은 쪽빛에 하늘은 그 투명함을 더했다. 마치 남북의 화해무드를 설명하기라도 하듯. 

서울의 한강과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임진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이르자 모두 통일동산 주차장에 차를 두고 서틀버스를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전망대에서 임진강 건너  북한 마을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의 모습(사진=신현지 기자)
전망대에서 임진강 건너 북한 마을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의 모습(사진=신현지 기자)

그들을 따라 해발 118m의 고지에 오르니 숨이 절로 터지게 북한 땅이 손끝에 닿았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상 아래로 흐르는 임진강 건너 북한마을이었다. 그러니 북한땅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강건너 마을이라는 표현이 합당하다는 생각이었다.

시야가 좋은 날이면 개성의 송악산까지도 볼 수 있다는 설명에도 눈은 이미 강 건너 옹기종기 조성된 마을에만 머무는데 부모를 따라 나온 어린녀석들도 까치발로 담 너머의 북쪽을 뚫어지게 건네다 보는 모습이었다. 녀석들 눈에 마을이 들어오는 것인지. 하지만 안개에 가려진 듯 강건너 마을은 형태만 그려질 뿐이었다. 

4층 라운지에 올라 전망대의 망원경에 눈을 가져가니 그제야 가물거리던 동네가 확연하게 들어왔다. 우리의 연립 형태의 건물들이 군데군데 조성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그 건물 속에 학교도 보였다. 축구를 하는 것인지 건물 마당에 연령을 구분할 수 없는 상당수의 인원이 우르르 몰려 뛰며 그곳의 현장감을 느끼게 했다.

망배단 (사진=신현지 기자)
오두산 통일전망대의 망배단 (사진=신현지 기자)

그곳에서 시선을 조금 돌리자 이번엔 자전거를 탄 남자가 마을길 사이로 바삐 달려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어디를 가는 것인지? 그들 위로 눈부신 백로가 유유히 날아 나락논의 푸른 물결사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순간 누군가의 탄성이 터졌다. “보인다. 보여, 어머머 쟤들 뭐하니? 쟤들도 우리가 보일까? 너 손 한번 흔들 봐 바...” 이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젊은 웃음이 터졌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사진=신현지 기자)
오두산 통일전망대(사진=신현지 기자)

하지만 그들처럼 모두가 신기하고 즐거운 건 아니었다. 그들 한편으로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지 못해 아련한 눈빛으로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는 백발의 노인의 모습이었다. 한 청년이 몇 번이고 노인의 눈에 망원경을 조준하는데 노인은 도통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듯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결국 청년도 포기한 듯 슬그머니 물러났다. 왠지 마음이 숙연해졌다. 어쩌면 실향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건네니 실향민은 아니고 북에 형님이 계시다고 했다.

“6.25전쟁 통에 형님이 끌려가셨는데 살아계신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요. 여태 형수님이 형님을 기다리시다 치매가 걸렸는데, 이제는 통일이 된다고 해도 어디 서로 알아보기나 하겠어요.” 82세의 박노인은 끝내 말을 잊지 못하고 몸을 돌려 세웠다.
 
그곳을 나와 약 15분 쯤 달려 이번엔 파주의 임진각관광단지를 찾았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1972년에 북한 실향민을 위해 조성된 곳이지만 지금은 관광명소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에 소규모 어린이 놀이시설을 개발하여 이날에도 가족동반 나들이객들로 놀이기구마다 붐볐다. 이곳이 비극의 역사의 현장이라는 걸 모르기라도 하듯 마냥 즐거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향민들이 고향을 제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임진각 최북단의 망배단에 이르자 누가 사르고 간 것인지 잔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망향의 노래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잃어버린 30년, 또 저만치 멈추어버린 경의선 철마는 수없는 총탄의 흔적을 안고서 그날의 비극을 설명하고 있었다.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사진=신현지 기자)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사진=신현지 기자)

총탄의 흔적으로 70년 세월을 견딘 철마 뒤로는 자유의 다리.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 2,377명이 자유를 찾아 걸어 귀환했던 자유의 다리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듯 전혀 긴장감 없이 나른했다.

자유의 다리 옆으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형형색색의 리본들. 그리고 그 뒤로는 더는 들어갈 수 없는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임진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으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형형색색의 리본 (사진=신현지 기자)
임진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으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형형색색의 리본 (사진=신현지 기자)

이렇게 비극의 현장을 돌아 나오자 멀리로 연을 날리는 어린이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유로 옆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로 낙조(落照)가 붉게 내려앉고 있었다. 어느새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사진=신현지 기자)
(사진=신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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