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가계 직원, 식당 종업원, 마트 시식행사요원 등 안해본 일 없어
피부 스킨케어 원장까지…"젊은 날 흘린 눈물 현재의 나를 만들어"

많은 역경들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긍정적인 사고 였다고 말하는 ' 미플러스 스킨케어'의 김성희 원장(사진=신현지 기자)
많은 역경들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긍정적인 사고였다고 말하는 ' 미플러스 스킨케어'의 김성희 원장(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생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굴곡을 넘는 방법은 개인에 따라 각기 다양하다.작은 고비에도 지레 겁에 질려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없이 반복되는 고비에도 끄떡없이 그것을 넘어서고 또 넘어서 세상과 맞장 뜨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피해 살짝 우회하는 사람 등등.

본지가 만난 '미플러스 스킨케어'의 김성희 원장도 이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우직하고 순박하게 굽이굽이 고비를 넘어 이제야 뒤를 돌아볼 여지가 생겼다며  환하게 웃는다.

“아마도 나 혼자였다면 그렇게 고생스럽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맑은 눈빛에 소녀처럼 동그스름한 외모로 고생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김 원장의 첫마디가 그러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녀는 지금껏 어떠한 길을 돌아 오늘 여기에 서있는 것일까? 올해로 그녀의 결혼 생활 20년, 그녀의 인생이모작을 들어보기로 한다. 

결혼 3년 만에 남편의 사업실패로 빚더미에 앉아...

“남편과는 연애로 만났다. 양가 반대가 심해 동거 1년 후에야 식을 올리고 시댁근처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회사원인 남편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해서 결혼 이듬해 평소 알던 지인의 미용실 안에 베드 한 개를 놓고 피부숍을 열었다. 그 일이 딱 3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3년의 세월이 내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 3년을 뺀 나머지의 17년을 나는 정말 투사처럼 살아왔다.”

남편과 불같은 열애로 시작한 결혼, 그러나 그 꿈같은 결혼생활 3년 만에 고난의 길은 시작되었다고.

“남편이 잘 다니던 섬유회사를 나와 친구와 속옷회사를 창업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경험부족으로 3년 만에 빚더미에 앉았다. 설상가상 나 역시 미장원에서 피부숍을 정리해야만 했다.

미용실에서 피부마사지 자격증이 없는 것을 문제 삼아 더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빚잔치에 남은 돈 이백만 원을 들고 의정부에 난방도 없는 허름한 방 한 칸으로 이사를 했다.” 

의욕상실의 남편, 이대로 굶어죽을 순 없어 시장의 생선가계에 취업

“그렇게 들어갈 방을 구해놓고 보니 끼니 때울 쌀이 없어 굶기를 반복했다. 남편은 종일 방안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업실패의 후유증은 그렇게 남편을 오랫동안 의욕상실자로 만들었다. 그런 남편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아니, 쌀 떨어진 것이 오히려 남편에게 미안해 안절부절 못했다. 둘이 굶어죽을 순 없어 집 근처인 시장의 생선가계에 취직을 했다.

젊은 여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주인아주머니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6개월을 일하니 주인아주머니가 자본금을 대줄테니 따로 생선 가게를 차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신데렐라 같은 행운으로 대기업 발탁, 그러나 동료의 모함에 권고사직으로 밀려나

그런데 난 당시 너무도 어리고 미숙했다. 생선을 주인아주머니 가게에서 가져다 팔고 그 남은 이익금에서 조금씩 자본금을 갚으라는 제안이었는데 갑작스런 그런 큰 제안에 겁이 덜컥 났다. 내가 그 돈을 갚지 못하면 어떡하지... 고민 끝에 제안을 거절하고 그것이 죄송스러워 생선가게를 나와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런 상황에도 남편은 여전히 집안에서 두문불출 했다. 그런 생활이 무려 3년이었다. 그러니 나는 하루도 쉴 여지가 없었다. 다시 찾은 갈비집도 만만치 않았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데도 꼭 일을 할 수 없는 상황들이 나를 괴롭혔다. 약 6개월을 일하다 친구의 소개로 마트의 시식행사요원으로 취직했다.

마트에서도 난 열심히 했다. 몸은 지치고 고달팠지만 내가 남편을 챙길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고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아 나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래서 난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그렇게 일을 하던 어느 날 그곳 슈퍼에 대기업인 모기업의 간부가 암행 나온 날이 있었다.

그날 그가 날 눈여겨봤던 모양이었다. 그의 발탁으로 생각도 못한 대기업에 정직원으로 채용이 되었다. 정말 신데렐라 같은 행운이었다. 열심히 살다보니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런데 행운 뒤에는 악운도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실감해야만 했다.

기업에 취직되어 약 1년 가까이 되었을 무렵 우리 부서에 슈퍼바이저를 뽑는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몇몇이 슈퍼바이저 물망에 올랐는데 난 그 자리에 낄 자격미달이라 그들 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에는 무신경했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서도 상당히 성실했던 것인지 자격 연수(年數)가 되지 않은 나도 물망에 올라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럼 좀 더 주위에 신중했어야 하는데 차기 슈퍼바이저로 물망에 올라있던 한 언니에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그 언니가 날 모함했던 것이다.

결국 그 언니는 슈퍼바이저가 됐고 난 그 회사에서 밀려나오고 말았다. 퇴직급도 받지 못한 채.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니, 결국은 내 억울함이 밝혀지긴 했지만 회사 내의 불미스런 사건을 극도로 경계하는 그들은 날 권고사직으로 처리했다.” 

자격증 취득 후 실장, 부원장으로 고객 늘어...하지만 사전 예고 없이 내쫓기기 예사 

그렇다고 기가 죽을 그녀는 아니었단다. 그녀는 그 일로 알게 된 고용보험지원으로 신혼 초 자격증 없어 서러움 받던 경락마사지의 자격증 취득에 나섰단다. 그때가 2005년, 의정부에서 일산까지 5개월 동안 학원 수강으로 자격증을 따낸 그녀는 3개월 수습기간을 거쳐 당당히 실장, 부원장 등으로 강남 일대에서 잘 나가는 전문 경락마사지사로 채용이 되었다. 남편도 다시 사업을 하겠다며 일을 찾아 나섰고. 하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그녀를 도와주는 것. 하는 일마다 실패였단다.

“남편은 뭐든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먹고사는 일보다 남편의 빚 갚는 일이 우선이었다. 더구나 자격증 취득으로 당당히 새롭게 시작한 경락마사지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자격증이 없었을 뿐이지 경력으로 따지자면 10년의 경력이라 나를 찾는 고객들이 많았지만 나를 채용한 원장들마다 6개월을 못 넘기고 날 버거워하며 잘라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나로 인해 고객이 많아지는 건 좋아했지만 고객들이 내 실력을 알아주고 인정하는 것에는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경계했다. 

동종업계 사람들 일 잘할수록 모함과 질투의 화살로 되돌려

실장들은 또 그들대로 원장 눈에 들기 위해 나를 몰아세우며 모함했다. 그런데 난 그때마다 나는 내게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이려니 스스로를 자책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아니었는데. 그 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날수록 난 더욱더 주눅이 들어 내 가치를 형편없게 생각했다.

그러니 자존감은 점점 더 결여되어 항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강남의 한 원장이 밀린 급여도 떼먹고 오히려 날 횡령으로 몰아세워 하루아침에 날 잘랐는데도 그녀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이해하려 애를 썼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지금 와 일일이 돌이키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바보스럽기까지 한 그녀. 그녀는 그렇게 매번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개인숍을 차릴 자본금이 없어 10년 넘게 강남으로 목동으로 피부마사지 숍을 전전했단다. 그런 중에도 남편은 여전히 집에 돈 한 푼 가져오지 않았다고.

결국 이혼선언, 그러나 남편없이는 살 자신없어...

“남편이 일을 하긴 했지만 이렇다 할 수입은 없었다. 사업실패를 거듭한 남편이 영화를 찍겠다며 방송쪽으로 나섰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영화도 찍고 이것저것 찍었지만 그것이 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그런 생활이 거듭되니 나도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 하나면 이렇게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는데... 결국 2015년에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했다. 남편도 그런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이혼을 결심하니 내가 이 남자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났다. 남편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남편을 부둥켜안고 실컷 울고는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 혼자였더라면 삶의 짐이 그처럼 무겁지는 않았을 텐데. 어쨌든 그녀의 우직한 뚝심과 순애보를 주위가 알아봤던 것일까 드디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단다. 2017년 한 고객이 그녀의 사정을 알고는 도움의 손을 내밀었단다.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믿음 하나로 버텨...드디어 통하더라

“‘뿌린 대로 거둔다, 진심을 다하면 언젠가는 통한다.’ 라는 말을 나는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그래서 동종업계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이용하려만 할 때도 언젠가는 이들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겠지 라는 믿음으로 성심껏 일해 왔다. 결국은 그것이 통했다. 작년 10월에 전 원장님과 한 고객 분의 도움으로 드디어 화곡동에 내 개인 피부마사지 숍을 열게 되었다.”

업계의 인정받는 실력자 되기 위해 더 공부할 생각

베드 4개와 직원 1명을 채용해 한창 자리 잡기에 여념이 없는 그녀는 이제는 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더욱이 남편도 이제는 돈을 벌게 되었고 그녀의 마사지 실력에 주위의 고객들이 늘어 연신 행복한 미소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계획은 피부미용에 관련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한다.

“작년에 오픈한 것이라 아직은 자리가 조금 덜 잡혔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대학에 가서 피부미용에 관련한 공부를 더할 생각이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좀 더 알찬 서비스를 제공해드리고 또 이 바닥에서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실력자로 거듭날 생각이다. 또 강단에도 서고 싶은 것이 꿈이다.”

끝으로 그녀는 이렇게 마무리를 지으며 서둘러 일어선다.

나를 버티게 한 건 긍정적인 사고...정말 삶이 나를 힘들게 하거든 실컷 울어라. 

“지금껏 내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나의 긍정적인 사고였다. 아무리 힘든 일에도 한번 실컷 울고 나면 다시 일할 힘이 생기곤 했다. 즉, 이는 내 긍정적인 사고가 날 컨트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삶이 나를 힘들게 하거든 실컷 울어라. 그럼 오기가 생겨 다시 도전할 힘이 생길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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