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준비하는 전통시장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추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가을 밤 휘영청 떠오른 만월이 아닐까 싶다. 이어 세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과 고향의 모습일 것이고. 그래서 60~70년대 산업화에 밀려 고향을 떠나온 세대들에게 추석은 그 어떤 때보다 더한 귀소본능에 고향을 찾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추석명절에 서울역과 영등포, 용산역은 귀성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으니. 전국의 고속도로 역시 거북이보다 더한 느린 걸음으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고향의 마을길도 들떠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읍내의 떡 방앗간에도 추석 송편 만들기에 분주한 아낙들의 걸음은 전날부터 길게 줄을 이었다. 

이처럼 고향을 찾는 인파에 민족의 대이동이라고까지 지칭하는 추석이 우리의 대명절로 자리매김하게된 것은 삼국시대 초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 때 왕녀가 7월 15일에서 8월 15일까지 한 달간 도읍 안의 부녀자들의 패를 갈라 두레 삼 삼기를 하여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회소곡 會蘇曲>을 부르며 놀았다는 것에서 그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추석이 법정공휴일로 제정된 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부터였다. 그 이후 1986년에는 추석 다음날, 1989년에는 추석 전날이 휴일로 지정되면서 지금과 같은 ‘3일 연휴’ 체제가 완성됐다. 하루만 쉬던 추석이 2일 이상 쉬는 ’연휴’가 된 건 추석 다음날 일요일이 붙은 1951년이 처음이었다.

(사진=신현지 기자)
 취준생들에게 추석은 여느날과  다름없다. (사진=신현지 기자)

그때 그시절... 8만 귀성객 몰린 서울역, 기동경찰관들 대막대기로 귀성객 정리
이후 연휴가 법제화된 1986년에 이르기까지 일요일을 앞뒤로 낀 추석연휴는 1951, 1954, 1958, 1967, 1974, 1975, 1981, 1984년 등 모두 8번 있었다. 10월3일 개천절과 이어진 이틀간의 연휴는 1963년 한 차례였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추석이면 기어이 고향을 다녀오겠다는 귀성객들로 열차와 고속버스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60년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정원87명의 3등 객차 안에 2백30여 명 씩이나 들어 찬 객차 안은 이젠 더 앉지도 서지도 못해 짐 얹는 선반이 인기 있는 침대(?)로 변한다고 보도했다. 더불어  8만 귀성객이 몰린 서울역엔 철도 직원 외에 4백80여명의 기동경찰관까지 동원되어 귀성객들을 정리하느라 기다란 대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데모 진압 장면을 방불케 한다고도 했다.

이와 같이 귀성전쟁을 치르고도 고향 친지를 찾아 명절을 보냈던 추석의 풍속도가 언제부턴가는 점차 약화되어 4차 산업혁명 시대라 부르는 오늘에는 놀라운 속도로 달라지고 있다. 더욱이 여성의 억압체계인 가부장제가 무너지고 1인 가족이 늘면서는 추석의 의미마저 쇠락해지고 있다.

22일 인천공항에는 출국을 기다리는 인파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22일 인천공항에는 출국을 기다리는 인파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이제 차례.성묘는 미리 미리... 추석연휴엔 해외에서 즐겨

이와 관련하여 목동의 주부 M 씨는 가족회의를 통해 올 추석부터는 차례를 생략하기로 했다고 한다. 대신 추석연휴를 이용한 가족 나들이 계획이 있단다.

“추석에 가족 여행을 떠나보기는 처음이에요. 시아버님이 그리 해도 좋다고..., 감사하죠. 솔직히 그동안 명절이면 한 1주일 전부터 울렁증과 두통을 겪었는데. 시댁이 광주인데 명절에 시댁을 가려면 빠르면 8시간, 길게는 10시간도 넘게 운전해서 가는데 얼마나 진이 빠져요.

또 그렇게 가서는 가는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부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잖아요. 남자들이 좀 도와주면 좋을 텐데, 어디 그래요. 그냥 앉아서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더구나 시골 어른들은 남자가 부엌에 들어오면 무슨 끝일이라도 날 것처럼 정색을 하시니 남자들은 그릇하나 안 치워줘요. 거기에 꾀 많은 동서는 회사일이 바쁘네, 어쩌네 하면서 빠지기 예사고. 그러니 동서랑도 사이가 좋을 리가 없죠. 그런데 올 추석부터는 그런 스트레스 안 받으니 너무 좋아요. 대신 추석 앞 당겨 시댁에 미리 인사드리고 올 생각이에요.”

안양의 주부 k(69세)씨도 올 추석에 해외여행이 잡혀있다고 한다. “추석연휴에 태국에 가기로 했어요. 차례가 있어서 망설였는데 올해는 작은 동서네서 지내기로 했어요. 애들이 그렇게 하자고. 어디 큰아들만 자식이냐고 우리 딸이 나서서 그러는 바람에. 그래서 딸 덕분에 올 추석부터는 3형제가 돌아가면서 차례지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솔직히 좀 불안하기는 해요. 스물셋 시집오던 해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은 없던 것이라.” 

또 영등포 B 씨 부부는 추석 앞뒤로 이틀 연차를 내서 9일간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보낼거란다. “시댁은 서울이고 친정은 대구라 명절에 한 번도 친정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신데 자식도 나 하나고. 그래서 명절 때마다 속상했어요. 나 혼자라도 가겠다고 해도 어디 시어머님이 좋아라 하시나요. 눈치껏 남편이 방패가 되어 주면 좋은데 그런 눈치도 없고. 그러던 사람이 회사 직원들이 명절에 처갓집은 왜 안가냐고들 하고 또 주위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올해부터는 처가에도 가자고...”

인생이모작을 시작하는 중년의 수험생들이 늘면서  추석 당일에도 문을 개방하는 독서실이 늘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인생이모작을 시작하는 중년의 수험생들이 늘면서 추석 당일에도 문을 개방하는 독서실이 늘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이에 여행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전국 성인남녀 1,000명 대상 설문 조사 결과 ‘추석은 연휴의 하나일 뿐’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약 60%에 달했다. 또 추석 차례상을 차리는 소비자도 7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추석연휴 해외 여행 출국자수도 2017년 열흘간의 황금 휴일을 계기로 평소 3배 이상 급등했다. 국내 거주자가 해외에서 쓴 카드 결제 금액도 2016년에 143억 달러,  2017년에 171억 달러로 약 20% 증가했다. 

불 꺼지지 않는 학원가...취준생들 ‘명절피난처’로 도피

이처럼 추석 여행객들이 증가하는가 하면 청년실업률 속에 나 홀로 추석을 보내는 이들도 많아졌다. 특히 노량진 학원가에는 추석연휴 내내 건물마다 들어찬 수 백 명의 학생들이 추석특강에 몰입해야 한다. 이들 중 밥 먹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을 오로지 책과 씨름중이라는 A 씨. 그는 노량진에서 경찰준비 올해로 3년째다. 

“언제부턴지 명절이 부담스럽고 괴롭더라고요. 학원 수업이 없어도 일부러 명절에 집에서 나와요. 친척들 보기도 그렇고 내 코가 석자라 조카들 어울리기도 그렇고. 그리고 간만에 만나는 조카들 용돈이라도 줘야 하는데 어디 내 형편에...그냥 학원 나오는 게 편해요.”

지방에서 올라와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J씨도 명절을 잊은 지 오래라고 한다. “올해는 합격해서 추석에 꼭 집에 내려가려고 했는데...기분이 별루죠. 일부러 핸드폰도 꺼놨어요. 엄마가 전화할 것 같아서요. 엄마 목소리 들으면 괜히 그렇잖아요. 그래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있으니 서로 위로는 돼요. 그리고 학원도 명절이라고 휴강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오히려 ‘명절피난처’라는 구실로 특강을 하나 더 열어 학생들 주머니를 털어가죠.” 

11월 수능을 앞둔 대치동 학원가도 마찬가지다. 추석연휴에 맞춰 진행되는 ‘추석특강’에 오히려 역귀성 학생들로 만원이다. 늦은 시간이면 부모들 차량까지 밀려 학원주위는 때 아닌 교통혼잡이다.

혼추족...추석연휴엔 오롯이 혼자 있는 게 부담 없어

독립은 했지만 가정을 꾸릴 계획이 없는 ‘혼족’이 생기면서, 명절 스트레스를 피해 혼자 집에서 편히 쉬기를 선호하는 ‘혼추족(혼자 추석을 보내는 사람들)’도 늘었다. 출판업 7년차S(35세)씨도 혼추족이다. 그는 혼자 명절을 혼자 보내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고 한다.

“평소 주말에 제대로 쉬어 본 적이 별로 없어 이번 추석연휴를 오롯이 즐겨 볼 생각입니다. 집에 가면 더 불편해요. 여자는 있니? 결혼은 언제 할래? 연봉은 얼마니? 집은 마련할 수 있니? 등등, 그때마다 거북하죠. 그러니 혼자 있는 것이 편해요. 외로움요? 전혀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고 가까운 곳에 여행도  하고 혼자 맛있는 음식도 찾아 먹으러 다니고...” 

다음소프트 조사에 따르면, 이처럼 혼자 추석을 보냈거나 혼자 보내길 희망하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89%에 해당할 정도로 그 숫자가 점차 커지고 있다.

추석연휴를 노린 성형고객에 성형외과 문전성시...

이뿐만이 아닌 성형외과도 추석연휴를 맞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특히 강남의 성형외과는 지난봄에 이미 예약이 완료될 만큼 추석을 노리는 성형 고객들로 즐거운 비명이다. 

의료업 18년차로 평소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주부 P씨(49세), 그녀도 3개월 전에 예약을 했는데 겨우 시간을 얻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있으니 관리를 해도  피부가 늘어지고 특히 눈꺼풀이 처져 이번 추석연휴에 눈 성형수술을 하려고요. 앞뒤로 연차내고 하면 무리 없을 것 같아서요.“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추석당일에 시댁에 갈 일이 걱정이란다. “시댁에 가면 어른들이 금방 알아볼 텐데, 눈썹이 찔러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번 추석에는 남편과 아이들만 보내고 집에 혼자 남아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한편 강남지역 성형외과 병원들에 따르면, 26일 대체공휴일을 활용하면 22일부터 26일까지 총 5일 간의 긴 휴식기간을 가질 수 있어 추석 연휴 기간 시술예약이 평소보다 3배가 꽉 찼다.

선호도가 높은 시술로는 눈성형과 코성형이 가장 많고, 그 외 보톡스, 필러 등의 간단한 시술이나 리프팅시술, 지방이식수술 등이 차지하고 있다.성형수술 계획을 세우는 연령층도 다양하다. 10대 후반 청소년부터 20~30대 대학생과 직장인, 40~50대 엄마들도 추석일정에 맞춰 회복기간을 고려한 성형수술을 계획하고 있다.

신(新) 추석풍속도를 읽어볼 수 있는 곳은 판매업체도 예외는 아니다.  1인가구와 ‘혼밥족’이 증가하면서 판매업체들도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특히 백화점·대형마트 등 유통업체는 화려한 포장의 값비싼 명절 상품 대신 작은 포장과 가성비를 중시한 간편한 명절 상품들로 추석 나홀로족들을 겨냥하고 있다. 동네의 편의점들도 추석 특선 간편식 일명 ‘호추족’을 위한 제품 판매로 추석특수를 노리고 있다. 

30대 싱글 직장인 L씨는 이번 추석에 ‘1인 맛집 음식 선물세트’를 회사에서 받았는데 식사 때마다 간편하게 한 봉지씩 먹을 수 있어 음식 쓰레기도 나오지 않아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미취업 청년들, 추석연휴엔 차라리 아르바이트가 속 편해

추석연휴기간을 노려 일을 찾아나서는 알바족들도 급증하고 있다. 특히 긴 연휴기간과 추석까지 겹치면서 대목을 맞은 유통업계와 물류·배송업체들이 단기 아르바이트 채용이 늘어나  하루 4∼5만원 이상의 급여가 보장된 자리’를 노린 학생·주부들의 신청이 눈에 띄게 급증했다. 이에 미취업 중인 D씨도 단기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아직 취업을 못한 상황인데 친척들 만나는 것도 껄끄럽고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이죠. 차라리 친척들을 피해 일도하고 돈도 버는 게 낫다는 생각에 신청했는데 모르겠어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자리가 있을지.” 

이처럼 추석이 전통적인 명절 문화가 사라지면서 명절 연휴를 보내는 풍속도가 각각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종교적ㆍ개인적 이유로 차례를 지내지 않는 가정도 늘었고 차례음식과 벌초를 대신 해주는 대행업체의 증가도 옛말이 되었다.  
 
이에 전문가들은 1인 가족이 늘고 전통적인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가족이 늘면서 명절풍속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핵가족화가 심화되면서 먼 친척들과의 교류가 뜸해지는 것도 한 원인으로 꼽고 있다.  

한편 통계청의 ‘2017년 인구주택총조사 전수집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가구 중 5인 이상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5.8%로 매년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매년 증가세를 보이는 1인 가구는 28.6%, 2인 가구는 26.7%로 1~2인 가구가 전체의 55.7%를 차지했다. 3인, 4인 가구는 각각 21.2%, 17.7%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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