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적 영장 발부로 정치적 판단한 법원, 이탄희 판사의 항의 이후 1년9개월만, 대법관들의 혐의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법관 블랙리스트를 시작으로 재판거래 의혹으로까지 일파만파 불거진 사법농단 사태가 드디어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강제 수사로 귀결됐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한동훈 3차장검사)은 9월30일 오후 양 전 대법원장과 차한성·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4명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했다. 혐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지만 재판거래·판사 탄압·재판 개입 등 다양하다.
사법농단에 대한 영장을 모조리 기각해왔던 법원이 태도를 바꾼 것일까. 그건 아니고 가장 유의미한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은 고 전 대법관만 이뤄졌고, 양 전 대법원장은 자동차만, 박 전 대법관과 차 전 대법관은 사무실(로스쿨과 로펌)에 대해서만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선택적 영장 발부의 배경을 보면 법원의 정치적 판단을 읽을 수 있다. 제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원내 4당이 특별재판부 설치까지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법원도 모조리 기각하긴 어려웠다.
구체적으로 양 전 대법원장의 자동차는 재임 중일 때가 아닌 퇴임 이후 사용했던 것이었고, 가장 최근 퇴임해서 사무실이 없는 고 전 대법관만 주택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다. 최대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 하도록 선택적으로 영장을 발부해주면서도 비판은 덜 받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검찰은 전현직 판사들을 소환조사한 결과 유의미한 커넥션을 어느정도 밝혀냈고 법원도 우두머리인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영장을 기각할 수 없었다. 검찰은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2017년 2월9일 이탄희 판사(현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소속)에게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을 겸임하는 좌천성 인사명령이 내려졌고 이 판사는 20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판사는 판사 동향 리스트를 관리해야 한다는 부당한 지시를 수 차례 받았고 결국 참지 못 하고 항의했다. 이 판사의 항의에 사법농단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었다.
말이 동향이지 판사들에 대한 뒷조사였다. 상고법원 도입을 숙원사업으로 여겼던 양 전 대법원장의 기조에 비판적인 여러 판사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런 블랙리스트 문건이 폭로되고 여론의 압박에 떠밀려 대법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됐던 때가 2017년 3월이었다. 이 과정에서 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양 전 대법원장이 “책임을 통감한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문건에 대한 연루 가능성을 진술한 판사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3명의 대법관들도 부산 법조비리 판사에 대한 재판 개입 의혹,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의료진 소송에 대한 개입, 공보관실 예산 횡령 등 혐의가 무겁다.
가장 큰 혐의는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을 지연시켰다는 의혹이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2013년 12월과 2014년 10월 당시 행정처장이었던 차 전 대법관과 박 전 대법관을 만났다. 윤병세 전 외교부장관도 동석했다. 두 행정처장까지 나섰던 청와대와의 재판 지연 거래에 양 전 대법원장이 모를 리가 없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한편, 검찰은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USB를 통해 내부 자료들을 상당수 확보했고, 무엇보다 스모킹건으로 불리는 이규진 전 실장(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실장)의 업무수첩을 통해 윗선에 대한 혐의를 규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전 실장의 수첩에는 △윗선의 직접 지시 내용 △실무진에게 전달한 지시 내용 △주요 회의 내용 등이 정리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실장은 이탄희 판사의 최초 갈등에 연루된 인물이고,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중대한 사건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대법원에 유출한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 행정처의 법관 사찰 문건을 삭제한 공용기록물손상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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