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최고의 낙조를 자랑하는 충남 태안군 꽃지해변(사진=신현지 기자)
서해안 최고의 낙조를 자랑하는 충남 태안군 꽃지해변(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봄에만 여심이 흔들리는 건 아니다. 가을에도 여심은 흔들린다. 어디로 떠날까 고민할 건 없다. 서해안 최고의 낙조를 자랑하는 충남 태안군으로 떠나보자.

붉은 노을 속에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 바위로 변했다는 ‘할미 할아비 바위’의 전설을 만나보는 것도 가을 여행으로는 그만일 듯싶으니. 가을바람에 붉게 물드는 낙조와 백사장을 따라 지천으로 피어있는 해당화에 ‘꽃지해변’이라 불리는 만큼 주변의 경관 역시도 환상적이다.

리아스식 지형의 표본으로 들쭉날쭉한 땅줄기와 바다가 뒤엉킨 해안선 길이만도 무려 530여㎞, 이 긴 해안선을 따라 30여 곳의 크고 작은 해변과 갖가지 숨겨진 비경에 가을을 낚는 여행객의 하루는 찰나처럼 짧기만 하다. 

이른 새벽, 드디어 본지도 태안으로 가을여행길에 나섰다. 서울에서 출발, 서해안고속도로의 서산나들목을 빠져 도착한 곳은 청산수목원, 9만 9200㎡(약 3만여평)의 넓은 대지위에 연꽃과 수련, 창포 등 200여 종의 습지식물과 계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수목들이 600여 종이나 있어 태안 여행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일상을 털고 태안을 찾은 여행객들이 안면도 자연휴양림의 산책길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때맞춰 팜파스 축제 기간이라 이른 아침부터 여행객들의 걸음은 줄을 잇는다. 친구, 연인, 가족들로 주차장은 순식간에 빈틈없이 만원이다. 그 많은 관람객 중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백팩을 둘러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쾌한 걸음들이 꼭 가을소풍 나선 여고생들의 모습이다. 고향친구 6명이 이른 새벽 서울에서 뭉쳐 서해안 낙조를 낚으러 나섰다고 한다. 어릴 적 고향친구로 뭉치면 그리 앳되고 투명해지는 것인지. 그녀들의 미소가 가을 햇살만큼이나 청량하고 상큼하다. 

오늘만큼은 누구의 아내, 엄마를 잊고 즐겨보겠다며 하루 일탈을 선언하는 그녀들을 따라 들어오니 입장료가 다소 부담스러운 7천원이다. 그러니 마음이 급하다. 빈틈없이 다 보겠다는 생각에서다. 한데 초입부터 핑크뮬리(학명 Muhlenbergia capillaris)다. 아침이슬에 함초롬하게 젖은 핑크뮬리가 마치 분홍솜사탕을 연상케 하며 걸음을 붙잡는다. 아까의 그 여인들이 아침햇살에 로맨틱하게 녹아내리는 핑크뮬리에 파묻혀 헤어 나올 줄 모른다. 아니, 종일 그 안에서 뒹굴 기세다. 

그런 그녀들을 앞지르자 이번엔 팜파스그라스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수목원마다 외래종 식물이 자리를 차지한 것인지 가녀린 모습이 가을분위기로는 그만이지만 뭔가 모르게 씁쓸하다. 솔바람 속에 하얗게 나부끼며 서걱대는 우리의 억새가 새삼스럽게 그리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홍가시나무와 황금 삼나무길에 금세 마음을 빼앗긴다. 마른 연잎의 황량함을 간직한 연원도 나름 운치 있다. 

억새와 닮은 외래종 팜파스그라스가 수목원을 찾은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억새와 닮은 외래종 팜파스그라스가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이어 모네정원, 동물농장, 삼족오 미로공원, 고흐, 천지창조 등 정원도 발길 닿는 곳마다 가을이 익어 걸음을 붙잡는다. 정원마다 서양예술가들의 작품 속 배경을 테마로 꾸며진 모습이라고 한다. 하지만 관람객의 눈으로 그 주제를 읽어 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어디에도 주제의 설명서가 없다. 그러니 뜬금없이 툭툭 나타난 서양조각상들이 오히려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쉽다는 생각은 아니다. 테마를 읽어내려 애쓰기 보다는 잘 다듬어진 수목에 찬사를 던지며 함께한 이들과의 추억을 만들면 되는 것을. 그렇게 두어 시간을 돌아 나와 이번엔 안면도자연휴양림이다. 안면 읍내를 지나 안면대교에서 영목항 방향으로 약 15km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서해낙조를 즐길 수 있는 꽃지해변과는 근접의 거리라 낙조를 감상하기 위한 동선을 좁혀 좋다. 

135㏊ 면적의 안면도자연휴양림에서 볼거리는 수령 100년을 자랑하는 소나무 천연림이다.  섬 전체에 집단적으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여행객들은 절로 탄성이다. 소나무들이 내뿜는 솔향기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도 이곳 휴양림만의 경험이다.

청산수목은 밀레,고흐, 모네 등의 예술가들의 작품 속 배경이 테마로 꾸며져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청산수목은 밀레,고흐, 모네 등의 예술가들의 작품 속 배경이 테마로 꾸며져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특히 이곳의 소나무는 고려 때 궁재와 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조선왕실에서도 궁궐을 짓는 재목과 왕족이 죽으면 관곽재로 혹은 조선재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경복궁을 지을 때도 이곳의 소나무들이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오랜 세월 우리 역사와 함께 해온 소나무 숲에는 일렬로 배치된 휴양림도 있어 여행객들에게 인기다. 물론 예약을 통해야만 하룻밤 편안하게 지친 심신을 달래고 갈 수 있다고 한다. 

이외도 이곳 휴양림의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모시조개봉, 바지락봉, 새조개봉, 탕건봉을 만날 수 있다. 이들 정상에서는 태안의 빼어난 비경을 한눈에 관람할 수 있다. 내친김에 산책로를 따라 탕건봉에 오르니 뜻밖에도 청산수목원에서 만났던 여인들이다.

200여종의 습지 식물과 600여종의 수목에 여행객의 걸음이 줄을 잇는'청산수목원' (사진=신현지 기자) 

핑크뮬리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던 그녀들이 탕건봉에 올라와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런데 아침나절 한껏 멋을 부려 차려입은 모습은 간데없고 이곳에 비치된 운동기구에 매달려 근력자랑들이다. 일탈도 참으로 재미있게 하는 여인들이다. 

다시 그곳을 내려와 이번엔 휴양림 맞은편의 수목원이다. 이곳은  총 42㏊의 면적에 신규로 조성된 한방약초식물원을 포함한 25개의 정원이 다양한 수목과 야생화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여행자의 하루는 순식간이라 그것들을 세심하게 다 돌아볼 여유는 없다.

빠른 걸음으로 수목원의 가을 운치만을 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서둘러 서해안 최고의 낙조를 즐길 수 있는 꽃지해변으로 달린다. 
 
드디어 태안8경 중 제 8경인 꽃지해변, 발 빠른 움직임에도 이미 해변은 낙조를 감상하러 나온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방포항 인근의 꽃다리 위와 해변의 주차장 맞은편의 꽃지일몰조망공원에도 온통 여행객들이다. 그들 틈을 비집고 앉자 검은빛으로 변해버린 바다 위로 검붉은 불덩이의 모습이다.

한적한 해변에 가을 여행에 나선  여인들의 웃음이 싱그럽다 (사진=신현지 기자)
한적한 해변에 가을 여행에 나선 여인들의 웃음이 싱그럽다 (사진=신현지 기자)

아, 자연의 신비가 이토록 경이로운 것인지. 전설의 ‘할미 할아비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불덩이는 마치 태고적 우주창조의 비밀처럼 두렵기조차 하다. 그러니 바다조차도 숨을 멎어 검푸르게 질린 모습이다. 그 위를 흥건한 핏빛의 하늘이 금세라도 삼켜버릴 자세인데 이 순간을 놓칠 새라 여행객들은 일제히 카메라를 들어올린다.  

언제 달려 내려온 것인지 아까의 그 여인들도 렌즈에 낙조를 담아내느라 바쁜 손놀림이다. 그러나 그 경이로운 모습도 잠깐. 조심스럽게 바위 사이를 통과한 불덩이는 이제 검은바다에 누워 붉은 숨을 토하고 주위는 적막한 어둠이다. 그제야 여행객들은 차가운 밤바람을 알아채고는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6명의 여인들도 일어선다. 해변 근처의 펜션을 예약했다며 서두르는 폼이 아무래도 태안의 밤을 하얗게 지샐 기세다. 태안의 가을밤은 이렇게 여행자들에게 또 하나의 가을 추억을 남기며 한없이 깊어지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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