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훈 작가 초대전
임동훈 작가 초대전 포스터 

[중앙뉴스=윤장섭 기자] 작가는 무지의 거대한 캔버스 위에 잉크 방울을 떨어뜨리듯 수없이 많은 물감을 떨어뜨린다. 그것도 한 방울 한 방울씩. 작가는 이 떨어진 물감들이 자연스럽게 증발되어 마를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했다.

그가 무수히 찍어가는 이 점들은 겹겹이 쌓이거나 일렬종대로 늘어져 길이 된다.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갈래의 선으로 남아 유희하며, 마침내는 하나의 앵포르멜 이미지 혹은 형상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거의 수행에 가까운 이 반복적인 “방울 놓기”의 작업이 끝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명상적인 수행하기는 시나브로 다시 이어지는데 실리콘으로 얇게 화면 위에 덮어 바르고 그 실리콘 위에 또 점을 찍는 번거롭고 조심스러운 물감 놓기를 <반복>한다. 겹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정한 공간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그는 여러겹의 층을 올려야 드디어 모든 수고스러운 시간의 흐름이 만든 층과 결이 탄생 한다.

임동훈 작품
임동훈 작품

마침내 그가 긴장하며 쏟아놓은 처녀림 같은 맨 얼굴이 정갈하고 담백하게 민낯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이 임동훈 작가의 순수노동의 결과이다.

그가 펼쳐놓은 우주 같은 공간에 때로는 핑크빛, 블루, 회색 등 은은한 색채 위에 마치 아스라하게 미리내처럼 쏟아진다.

임동훈 작가 캔버스의 광활한 지평에 벌어지는 모든 광경은 결코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조용하고 장엄한 풍경이 탄생 되지 않는다.그것은 전적으로 시간의 결과인 깊이 일수도 , 수행을 향한 과정, 수행자의 몸에서만 나온다는 사리 같은 것이다.

나는 먼저 그가 그리는 이미지보다는 점을 찍는 행위에 크게 주목한다. 왜 그는 선을 그리지 않고 점을 찍는가 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점은 모든 도형의 시작이며 , 궁극적 구성 요소이며 동시에 가장 단순한 도형으로서 위치만 있고 길이도 없는 것이다. 또한 크기를 가지지만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면서도 특정한 위치를 지정할 수 있는 하나의 개체에 불과한데 작가는 그것에 집중하는가 라는 의문 때문이다.

그는 이 번거롭고 수고로운 작업을 여러겹으로 올리면서 그 층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 자신의 행위를 되묻고 검증한다. 그리하여 그 행위가 명백한 자기의 예술언어가 되는가를 실험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의 실험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오래도록 끝나지 않는 실험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임동훈의 작업에 바치는 시간은 온전히 임동훈의 신념과 철학을 직조하는 공간이자 영원한 시간에 해당된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점찍기가 명백하고 확실한 자신의 존재를 검증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비유컨대 20세기 현대미술 최고의 이단아 액션 페인팅의 잭슨 폴락의 <행위>에 필적 할 만 하다.

그가 화폭에 어떻게 어떤 문양이 만들어지는가에 관심두지 않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동훈의 작업은 놀랍게도 그리는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을 관계 짓게 하는 자연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임동훈의 사유는 회화를 더 열린 회화가 되게 해주는 힘을 지니게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어느 화가는 매일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는 행위에 비유한 적이 있다. 동일해 보이지만 매일 매일의 쌀 씻음이 다르듯, 임동훈의 하나하나의 점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지금이 다르다.

이 작은 차이에 대한 정적인 관조와 행위가 세상의 무한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간다는 것이임동훈의 캔버스를 향한 점에 관한 지극한 사랑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임동훈의 화면을 해석할 때 단순하게 그가 화면에 무수히 겹겹이 찍어놓은 점들의 형태나 형상에 지나치게 연연해서도 , 그것만을 바라보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잭슨 폴락이나 샘 프란시스의 화면에 어지럽게 펼쳐진 점이나 떨어진 얼룩이 무엇을 닮았는가 알아내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확인 하려는 일과 다름없는 제스츄어이다.

그는 비록 화폭 하나하나에 점을 찍고 있지만 그는 점과 점사이의 여백, 그리고 그 점과 점의 관계. 더 나아가서 점과 점이 만나고, 점이 걸려 있는 모든 공간의 관계를 행위를 통하여 파노라마처럼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화폭에 만들어 놓은 모습들을 보면 특정한 어느 대상을 모티브로 삼지 않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작가가 고백 한 것처럼 “점을 찍다 보면 자연스럽게 형태가 나오고, 이 점들이 이동해간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고 할 뿐이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그림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선이 되고 형상을 만들고 그 이미지들이 모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의 결정체 일뿐이다.

이것들이 모여 무한의 세상을 열어 보이는 매개 항처럼 나와 타자가 만나는 하나의 장(場)이 바로 예술이자 작품이며 캔버스이다. 난 이것이 진정 바로 임동훈 작가가 점을 찍는 행위의 속내이며 그가 만들어낸 형상의 실체라 해석한다.

그가 만나는 이러한 무수한 점들의 만남은 세상의 무한함을 보여주는 어느 한쪽의 방향성을 가지며 진행하며 집중 되어있다.

화면의 중심 한 가운데로 방향이 주어지는가 하면, 마치 철판아래 자석을 두고 위에 작은 쇳가루를 올려놓은 것과 같이 특정한 방향으로 쏠려 이동하는 모습이 주요한 경관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동양회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화면의 여백은 크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캔버스는 사유하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역할, 그 속에서 점들과 함께 어울리고 섞이면서 호흡하는 장엄한 풍경의 연출자인 총감독이다.

그가 이전의 작품전에서 보였던 단세포 형상의 매스와 덩어리도 그런 점들의 변형일 뿐이다.

임동훈의 이런 무한 공간을 향한 점찍기는 그래서 중요하고 그를 서구의 미니멀리즘을 넘어서는 동양의 작가로 평가 받을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바탕을 핑크빛이나 블루 그리고 둥근 원형에서 보이는 점은 선을 만들고, 선은 면을 만들며, 면은 다시 하나의 입체를 만드는 이 점찍기의 궤적은 각자 중첩과 저마다 존재의 가치를 지니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얻는다.

 임동훈의 작품세계는 이렇게 이상향과 종착지는 바로 점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단순함과 그와 함께 동행하는 틈과 여백이 작품의 주변을 새롭게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풍경을 통해 관계를 복구하고 표현한다.

이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아주 의미 있게 발언한 고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그의 모든 예술행위를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순리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 점에서 그의 작품행위는 종교적 수행과 비슷하다. 그렇게 그의 화폭은 우리에게 밤하늘의 축포처럼 우리를 평온과 점들의 축제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종교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한 철학자 헤겔의 명령은 임동훈 작가의 작품 앞에서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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