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나의 맛있는 시 감상(207) // 은행나무 / 곽재구
최한나의 맛있는 시 감상(207) // 은행나무 / 곽재구
  • 최봄샘 기자
  • 승인 2018.11.12 0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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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봄샘 기자
최봄샘 기자

 

은행나무

곽재구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대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 곽재구 시집 『전장포 아리랑』(민음사, 1985) 시선집 『받들어 꽃』(미래사, 1992)에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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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복습해도 질리지 않는 시가 있다면 해마다 가을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위의 시다. 오늘은 시를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작품, ‘사평역에서’(1981, 등단작)로 익히 날려진 곽재구 시인의 ‘은행나무’ 를 불러내 보았다. 가을 가로수 중에서 은행나무는 단연 황금빛 제왕이다. 붉게 타오르는 단풍과는 달리 눈부시지만 자극적이지 않게 서서히 계절을 마무리해주는 노오란 나무들의 도열! 그 길을 걸어보며 역시 요맘때면 특히 자주 음미하는 시다. 가을은 짧고 시인의 노래는 길다. 다시 찾아온 가을과 함께 시인의 시도 이 가을을 물들인다. 시의 매력 중 하나인 무딘 감성을 깨워내는 생명력 아닌가? 은행나무 노란 잎새마다 시인의 깊은 눈빛이 물들었다. 화자의 눈을 통해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빛나는 눈썹이기도 하고 노오란 우산깃이 되어 아름다운 연서로 읽혀진다. 그리고 우리들 가슴에 잠자던 금빛 추억이 기지개를 켠다. 시가 있는 가을이 빚어주는 축복이다. 나침반은 겨울왕국을 향하고 절정의 지난여름을 배웅한다. 지금 은행나무는 길을 내느라 분주하다. 한 시절의 획을 그으며 떨어뜨리는 샛노란 희노애락!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이다. 오늘의 나침반은 높아진 키로 백설왕국을 가르키고 여름 커튼을 걷어낸 창가에 가을을 마무리하는 낙엽 몇 장 연서인 듯 날아든다. 오늘은 가을 엽서 한 장 첫사랑 아니 소식 없는 벗에게 보내보련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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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

시집 /『사평역에서』『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와온 바다』,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동화집 /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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