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면 어르신들은 김장철마다 대가족의 김장을 담는다 (사진=신현지 기자)
산내면 어르신들은 매년 김장철마다 대량의 김장을 담는다(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매년 열리는 구절초 축제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정읍시 산내면에 김장철이 돌아왔다. 아흔아홉 구비의 구절재를 돌고 돌아 해발250m이상의 산골짜기에서 만나는 첫 동네. 

산내면 능교마을에 하얗게 첫서리가 내리면 이 동네 어르신들의 손길은 부쩍 분주해진다. 높은 지형 탓에 가을은 스치듯 저물고 겨울이 빨리 찾아오기 때문이다.

11월 중순도 채 되지 않았는데 20가구 남짓한 이 동네 반 이상이 김장을 마쳤다. 굽이굽이 찾아 들어간 이 동네 들녘 역시도 벌써부터 깊은 동면에 든 듯 한적하다.

반면 밀양 박 씨 할머니 댁의 안마당은 평소와 달리 왁자하다. 다름 아닌 박 씨 할머니의 김장하는 날. 각처에서 살고 있는 아들 딸, 며느리, 손자 등 20여 명이 넘는 대가족이 박 씨 할머니 호출에 불리어 새벽부터 소란하다.

(사진=신현지 기자)
김장행사에 참여한 손자의 손길이 생경하다 (사진=신현지 기자)

“어떤 놈이든 올 김장에 빠지면 김치 한 가닥도 어림없을 텐 게 알아서들 오든지 말든지...” 이 같은 박 씨 할머니의 냉엄한 호출에 여섯 자식은 쓰다 달다 말없이 퇴근하기 무섭게 각자의 김치통을 챙겨 부랴부랴 산내면으로 모여 김장마당의 총 감독인 박 할머니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

딸들과 며느리들은 무를 자르고 김칫소를 버무리고, 또 마당 한 곳에서는 숯을 피워 고기를 굽고 삶는 등 이른 아침부터 다들 정신이 없다. 

물론 이런 풍경은 올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박 씨 할머니 댁만도 아니다. 이 동네 어르신들은 성장해서 나간 자식들 김장김치 챙기는 일에 몇 번의 겨울을 넘겼는지 기억할 수 없게 연례 김장행사가 된지 오래다.

그러니까 박 씨 할머니를 비롯하여 감나무집, 방앗간집 시암집, 대나무집 점방집 등등 이 동네 어르신들 대부분이 김장때면 으레 자식들을 불러 모아 김장행사를 치른다. 김장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자식이 이 동네 할머니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때도 이때라 가급적이면 김장행사에 빠지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이 동네 출신들은 모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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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마당에 함께 모인 가족들 얼굴에 웃음이 환하다 (사진=신현지 기자)

그 때문에 김장철이면 동네가 마치 명절이라도 돌아온 듯 북적거린다. 그러니 배추 양도 어마어마하다. 밭에서 뽑아 즉석에서 다듬어 절인 배추가 포기를 셀 수가 없게 많아 처음 김장행사를 맞는 손자며느리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런데 이 많은 양의 김장 준비를 이 동네 7~80시대 어르신들은 대부분 혼자서 해낸다. 하지(夏至) 지나 배추모를 심어 가꾸는 일에서부터 배추를 뽑아 집안으로 옮기고, 다듬고, 절이고, 씻고, 김칫소를 준비하고. 김장하는 날도 출근하는 자식들 사정을 살펴 주말을 이용해 호출한다.

그러니 어떤 자식이 그 호출을 거역할 수 있을까 싶다. 아니 솔직히 배추 포기마다 자식 사랑이 듬뿍한 김장행사에 감히 변명거리를 찾아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게 이들이다.  

“요새 집에서 김장하는 집도 있나요? 촌스럽게, 김치를 얼마나 먹는다고, 그 먼데까지...집에서 밥 먹는 날도 많지 않은데... 그냥 사먹는 게 더 경제적이잖아요. 맛도 그런대로 괜찮고. 회사일도 바쁘고 그러니 올 부터는 김장을 하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계세요.” 

이렇게 변명거리를 찾던 이들이 언제부턴가는 그 호출이 고맙고 반갑기만 한 것은 늦게나마 철이 들어서가 아니다. 한 해 한 해 다르게 노쇠해지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깝고 어머니의 남은 기력이 소중해서다.

그 때문에 올해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달려온 자식들의 모습에 밀양 박 씨 할머니는 그간 김장준비로 겹겹이 쌓인 피로를 말끔히 잊은 듯 평소 같지 않게 목소리가 커지는 모습이다. 

“야야 큰애야, 짜잔하게 고게 뭐다냐. 색깔이 허여니 영 아닌디. 색깔 곱게 고춧가루 애끼지 말고 푹푹 퍼넣어라, 그리고 자는 아까부터 왜 저리 놀란 표정이다냐. 이것은 청각인디. 우리 전라도 짐치는 야를 넣어야 시언허니 제 맛이 나는 법인디. 야가 안 들어가면 맛을 베려버려야. 글고 너거들 가져온 김치통들은 다 채운 것이다냐. 다시 말하지만 내 것은 한 통만 내놓고 다 가져가야한다. 나는 이가 성하지 않아 한 통만 가져도 내년 요만 때까지도 반은 남아 버린 게로...”  

박 할머니의 지시에 어느덧 마당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김치통마다 노모의 사랑이 가득한 김장김치로 채워진다. 이렇게 산내면 박 할머니의 김장행사는 내년을 기약하며 막을 내리고 다음 주는 방앗간 어르신 댁의 김장을 끝으로 이 동네 김장이 마무리 된다.

아마도 방앗간 어르신 댁의 김장마당도 오늘처럼 북적거릴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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