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대의 정치가·사상가로 성리학의 거두인 이언적 기리는 서원

희재 이언적 (1491~1553)제향하는 옥산서원 (사진=박미화 기자)
희재 이언적 (1491~1553)제향하는 옥산서원 (사진=박미화 기자)

[중앙뉴스=박미화 기자] 희재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옥산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경주시 안강읍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사적 제154호로 이언적(1491~1553년)을 제향하여 1572년(선조 5년)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1574년 사액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사진=박미화 기자)
 (사진=박미화 기자)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이언적은 조선 중종대의 정치가·사상가로 성리학의 거두였다. 경주를 대표하는 서원 옥산서원은 자옥산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자계 줄기에서 정경이 가장 명미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 영남사림파의 선구가 되는 이언적을 모신 만큼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까지 영남사림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훼철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화재로 옛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박미화 기자)
(사진=박미화 기자)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 측면 2칸에 2층으로 이루어진 꽤 규모가 큰 누각건물의 무변루 가운데 3칸은 아래위 모두 틔워 출입문과 대청으로 활용하고, 그 양쪽 1칸씩은 벽체로 막아 아래는 아궁이와 굴뚝을 설치하고 위는 온돌방을 들였으며, 양 끝의 1칸씩은 몸채에서 달아내어 누마루를 돌리고 부섭지붕을 얹은 형태다.

양 옆에 누마루가 있지만 중간이 온돌방으로 막혀 대청과 누마루 모두 개방이 제한적이다. 왜 담 밖에 펼쳐지는 좋은 경관을 차단하는 이런 구조를 채택했는지 알 수 없다.

2층 대청 안쪽 벽 위에 걸려 있는 편액 글씨는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로 편액이라면 당연히 정면 앞에 걸리는 것인데 무슨 까닭이 있을 듯하나 알 수 없다 한다.

편액의 한편에 부기된 글,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 라는 내용에서 ‘무변’의 뜻을 음미할 수 있다.

(사진=박미화 기자)
(사진=박미화 기자)

무변루 앞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은 강당인 구인당으로 가운데 두 기둥 사이를 꽉 채우며 창방 위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의 글씨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 54세에 쓴 것이다.

바로 뒤쪽에는 안을 향하여 편액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사액될 때 선조가 아계 이산해에게 명하여 쓰게 했던 글씨를 다시 새겨서 건 것이다. 만력 갑술년(1574) 사액 후 266년 되는 을해년(1839)에 화재로 불타버려 다시 써서 하사한다”는 내용이 편액에 부기되어 추사가 글씨를 쓰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다.

강당인 구인당을 돌아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희재 이언적(1491~1553)을 모신 사당, 체인묘가 있다. 내삼문을 거쳐서 출입하지만 봄가을 제향 때 외에는 늘 닫혀 있어 일반인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체인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비각 안의 신도비는 1577년에 세운 것으로, 글은 퇴계와 8년간에 걸쳐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이수에 새겨진 두 마리 용에는 누른빛과 푸른빛의 단청이 뚜렷이 남아 있다.

옥산서원 세심대 옆으로 흐르는 작은 폭포 (사진=박미화 기자)
옥산서원 세심대 옆으로 흐르는 작은 폭포 (사진=박미화 기자)

석조물에 단청을 올렸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실증적인 예다. 원래는 회재의 무덤 앞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산중일기』를 보면 정시한이 옥산서원을 찾았던 1688년 이전에 이미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으나 옮긴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자개천 가운데에 자리한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사진=박미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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