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금은 석유이고 푸른 황금은 물"이라고 했다.



지난 2월 10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세계 물 포럼'에 참석해 "20세기가 블랙 골드 시대라면 21세기는 블루 골드 시대가 될 것"이라며 "검은 황금은 석유이고 푸른 황금은 물"이라고 했다.

그러자 증시에선 물탱크를 제조하는 젠트로, 상하수도관을 만드는 뉴보텍의 주가가 솟구치더니 10여일 만에 주가가 200% 가까이 상승했다.

이들 종목뿐 아니라 양변기 부품을 제조하는 와토스코리아와 생태복원사업을 하는 자연과환경 역시 수자원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물테마주'로 거론되며 주가가 크게 뛰었다.

지난달 5일에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을 순방 중이던 박 전 대표가 현지에서 "네덜란드는 농업 강국이 될 만한 조건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정부가 잘 뒷받침하고 창의적으로 노력해서 농업의 갈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했다. 박 전 대표의 발언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우리나라에 전해지자 이번엔 조비, 효성오앤비 등의 주가가 요동을 쳤다.

박 전 대표가 '농업'을 강조했으니 비료 생산 기업들이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증시에선 한때 이런 수자원주와 농업주를 합쳐 '코스닥의 전원주(田園株)'라고도 했으며, 이들 주가의 동력은 박 전 대표였다.

이른바 '박근혜 테마주'. 박 전 대표가 추진하는 정책과 관련이 있거나 박 전 대표와 인맥으로 닿은 기업의 주식을 말한다.

최근 주가가 많이 오른 자동차·화학·정유주인 '차·화·정'보다 상승폭이 더 컸던 주식이 박근혜 테마주다.

물론 손학규, 오세훈, 김문수, 정몽준, 정동영, 유시민 테마주도 있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아프리카 TV'로 유명해진 문용식 대표이사가 민주당 유비쿼터스위원장으로 영입되면서 주가가 열흘 만에 40% 이상 오른 나우콤과,

사주가 손학규 대표와 친분이 있는 한세그룹 관련주들이 '손학규 테마주'로 주목을 받는 정도이고 나머지 후보 테마주들은 관련 주식수나 상승폭이 박근혜주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박 전 대표가 작년 말 저출산 대책을 담은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안을 공개할 당시 유아용품 업체인 보령메디앙스의 주가는 2000원대였으나 올해 초 1만3000원을 돌파했고,

아가방컴퍼니 역시 2000원대에서 1만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박 전 대표가 물류 정책을 강조하면 항만물류 주식이 오르고 교육을 역설하면 학원 주식이 폭등하는 식이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박 전 대표의 측근이 운영하는 기업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대박'을 친다. 인터넷 카페에 박 전 대표와 관련된 주식을 발굴하는 '박근혜 주식 연구소'까지 생겼을 정도다.

우리투자증권 관계자는 "박 전 대표와 관련됐다는 미확인 루머에도 주가가 오르니 일부 투자자들은 아예 박 전 대표의 입만 쳐다보는 형국"이라고 했다.

억지로 '박근혜'를 갖다 붙이는 '유사' '짝퉁' 박근혜주도 있다.

지아이바이오는 지난달 18일 자회사의 항암치료제 사업을 발표하면서 법률자문을 법무법인 새빛이 맡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은근히 박 전 대표의 동생 박지만씨의 부인인 서향희 변호사가 새빛의 공동대표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 회사 주가는 그날 8% 올랐다. 박 전 대표의 동생 부인이 일하는 회사와 단순히 법률자문을 맺었을 뿐인데도 박근혜라는 후광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

이후 새빛 측에서 부담을 느껴 자문 계약을 해지하는 바람에 이 회사 주가는 사흘 내리 하한가를 맛봐야 했다.

박근혜 테마주에는 정책 관련주뿐 아니라 인맥 관련주도 적지 않다.

박 전 대표의 조카사위가 운영하는 대유에이텍과 박 전 대표 사촌의 남편이 운영하는 동양물산, 박사모 간부가 운영하는 서한도 박근혜주로 분류된다.

능률교육은 최대주주가 5·16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경호실 간부였다는 소문이 뒤늦게 퍼지면서 '숨은 박근혜주'로 통했다.

그런데 박지만가 운영하는 회사로 인맥 관련주의 '대장주'가 되어 마땅할 EG는 다른 박근혜주 주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적은 편이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수방사령관을 지냈던 윤필용 씨의 아들 윤해관씨가 신임 대표로 취임한 미주제강의 주가의 오름폭이 컸다.

교보증권 관계자는 "박근혜주의 주가는 실적은 물론 박 전 대표와의 친밀도와도 무관하게 움직인다"며 "막연한 기대감을 배경으로 매수 세력의 자금력에 따라 주가의 등락폭이 결정된다"고 했다.

박근혜주들은 지지율이 발표되거나 박 전 대표가 주목을 받을 때 일제히 오르고, 인기가 주춤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급락하는 '집단행동'을 벌인다.

대선 테마주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지난 대선에서의 학습 효과가 자리잡고 있다.

2007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했던 대운하 사업 관련주의 폭등 현상 때문. 건설업체 이화공영은 2007년 7월 2500원이었으나 그해 12월 6만7400원까지 무려 2000% 이상 상승했고,

같은 기간 특수건설은 7000원대에서 4만9700원으로, 삼목정공은 3000원대에서 1만1000원대까지 수백%씩 치솟았다. 이번 대선의 경우 박 전 대표의 독주가 계속되면서 테마주 형성이 무려 1년 이상 앞당겨졌다.

증시 전문가들은 우려감을 표시하고 있다. 주가 흐름만 봐도 얼마나 위험한 투자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화공영과 특수건설의 경우 대선을 고비로 주가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현재 4000원대에 머물고 있다.

일부 박근혜 테마주도 루머가 퍼지면서 급상승한 이후 급락해 제자리로 돌아온 경우가 많다.

미주제강은 300원대에서 800원대까지 올랐다 최근 다시 300원대로 주저앉았고, 고령화 정책 수혜주로 알려졌던 바이오 회사들의 주가도 반짝 상승했다가 급락해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보았다.

증권사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친척 기업이 얼마나 혜택을 보겠냐"면서 "대선테마주는 거품이 많아 투자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테마주가 몰려 있는 코스닥 시장의 허약한 체질도 대선 테마주가 판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종합주가지수의 경우 지난해 1월 4일 1600에서 최근 2100을 오르내리고 있지만 코스닥 지수는 같은 기간 538에서 뒷걸음질쳐 현재 470선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코스닥에선 우량주들도 가랑비에 옷 젖듯 연일 주가는 내리막을 가고 있다.

농협중앙회 사모펀드투자팀 황지영 매니저는 "코스닥 시장은 투자할 만한 종목이 많지 않은 데다 가치주나 실적주를 매수해도 주가가 오르지 않다 보니 투자자들의 눈길이 대선 테마주에 쏠리고 있다"며 "성미 급한 한국인의 특성도 증시를 투기장으로 바꾸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박 전 대표 측도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부담스럽다는 분위기다. 박 전 대표의 대변인격인 이정현 의원은 "아직 대선이 많이 남은 데다 집권을 가정해 일부 주가가 오르내리는 현상에 대해 뭐라고 언급하는 자체가 부적절한 것 같다"고 했다.

박근혜 경선캠프 대변인을 지냈던 김재원 전 의원도 "박 전 대표에 대한 국민 기대감과 대세론을 반증하는 것이긴 하지만,

국가 정책이 기업 실적으로 이어지려면 아주 오랜 시간과 검증 기간이 필요하다"며 "그런데도 대선 후보의 말 한마디에 주가가 급등락을 반복하는 것은 한국 증시가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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