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장미키스』 펴낸 최정란 시인

사진출처 / 시산맥

 

시간은 피를 희석시킨다

최정란

 

 

시간이 섞인 물은 나날이 진해지고

시간이 섞인 피는 나날이 묽어진다

 

서로의 애경사의 의자를 채워주거나

지인의 장례식과 결혼식에서 마주치며

 

같은 피였다는 것을 잠시 추억하거나

서둘러 돌아서며 희석된 피를 확인한다

 

자꾸 묽어지다 보면 마침내 일 년 내내

안 보고 살아도 아무렇지 않은 날이 온다

 

그런데 낡은 피를 생각하면 왜 이렇게

미안하고 가슴이 빠개지게 아픈가

 

아무리 묽어져도 피는 서로를 당기는가

아무리 묽어져도 피는 잘리지 않는가

 

- 최정란 시집 『장미 키스』 (2018. 시산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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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인간의 진리인 듯 사용되어 온 익숙한 문장이다. 그런데 피보다 진한 물도 있는 세상인지라 외로운 이들이 모여서 이웃사촌을 이루기도 하며 살아가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성장기에는 오순도순 헤어질 날 없을 것처럼 서로 편들어 주며 지내다가도 때론 아웅다웅도 했지만 이런 우리 육남매를 부러워했던 외동딸 친구가 애틋하게 떠오른다. 형제자매가 없는 아이들은 외톨이가 되기도 했던 그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다 자라 한 가정을 이루어 나름 분주하게 살다보니 뿔뿔이 흩어진 언니 오빠 동생들에게 안부를 묻게 하는 詩다. 내가 서있는 지금의 내 자리를 돌아보며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무언가를 촉구하며 꾸중하는 회초리 같은 시의 맛도 있구나 고개 끄덕이게 한다. 피는 그 어떤 칼로도 베어버릴 수 없는 영속성 관계와 생명력을 의미하지만 시절을 지나다보면 희미해지는 핏줄의 안타까움이 있다. 시의 문장마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절절하게 내포하고 있음이다. 각박해지는 이 시대에 다들 저마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그러하지만 우리가 잊고 사는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지인들과 가끔 하는 말인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 정작 그런 말조차 못하고 사는 부모 형제는 아닌지, 화자가 ‘낡은 피’로 표현한 멀어진 가족,  헐렁해진 혈연의 정은 뼈아픈 죄책감마저 준다. 세월이 가져가버린 것이 혈육의 정인가! 물보다 못한 피, 혹은 낡은 피를 생각하면 가슴이 빠개지고 미안해진다는 화자의 마음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모두 붉은 피가 흐르는 탯줄을 끊고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묽어져도 피는 피라는 것을 시인은 일깨워준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부모 형제 그리고 일가친척이건만 정작 내리사랑에 충성하느라 식어가던 가슴 한 쪽이 다시 뜨거워진다. 이제 곧 우리 민족의 명절 설날이다. 가정마다 훈훈한 정이 뜨겁게 살아나 피어오르기를 손모아 빌어본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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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란 시인 /

경북 상주 출생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집 / 『사슴목발애인』 『여우장갑』 『입술거울』 『장미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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