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어스름한 어둠이 내리는 퇴근길, 연일 계속 되는 한파에 바람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야멸차기만 하고 정월 대보름을 앞둔 눈썹달이 초저녁 꽁꽁 얼어붙은 도심을 허랑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야들을 다 가져가기는 너무 많을 건디, 알아서 쓸 만큼만 가져가지 그랴”

지난 13일, 옷깃을 파고드는 추위에 성급한 걸음들이 물밀듯 지하철역을 빠져나간 버린 도심의 한 교량 위. OOO지하철역과 백화점을 연결한 교량의 한쪽 구석에서 나물 파는 이순덕(가명)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검은 비닐봉지를 펼쳐들다 말고 조금은 염려스럽다는 표정이라 순간 기자는 멈칫했다. 그러나 할머니 앞에 펼쳐 놓은 야채 더미라야 서너 개씩 올려놓은 감자와 당근, 양파, 그리고 한 움큼 분량으로 보이는 냉이와 시금치가 전부라 다 산다고 해도 일 이만원이 될까말까 했다.

더욱이 흘낏 쳐다보다 지나치던 한 행인이 성큼 뒤돌아와 감자와 양파를 사겠다고 나서주니 부담감은 덜했다. 아마 그도 시골의 노모가 생각이 났던 모양이었다.  

“오매오매, 고맙기도 해라. 내가 좀 일찍 나왔어야 혔는디, 수도가 얼어 터진 바람에 오늘 그것 고친다고...”

연일 이어지는 한파에 수도가 얼어 설비업체를 기다리느라 장사가 늦었다는 이순덕 할머니. 나물 떨이를 해준 덕분에 기자와의 대화가 어렵지 않게 이어졌다.

“아녀, 나 혼자 아니고 우리 아들이랑 같이 살어, 우리 아들은 이런 장사 하지 말라고 펄쩍 뛰는디 어디 그랴, 가만히 있으면 쌀이 나와 돈이 나와. 내 몸 성한디. 움직일 때까지는 뭐라도 꼼지락거려야 맘도 편허고. 가만히 있으면 자꾸 아픈디만 생각나고.

좀 천덕시럽기는 혀도 이렇게 나오면 지나가는 사람 구경도 하고, 혼자 우둑커니 있는 것보다 시간도 잘 가고, 그리도 오늘은 참말로 춥기는 춥네 그랴.”  

이처럼 말을 하던 이씨 할머니가 다시 말을 바꾸건 같은 방향을 핑계 삼아 길가 포장마차 어묵을 권하는 기자의 넉살 덕분이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이씨 할머니의 고향은 순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나오던 그때가 지금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자신의 힘으로 세 남동생을 대학까지 보냈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 놨다. 마치 그간 말 상대가 필요했다는 듯 스스럼없이. 

(사진=신현지 기자)

그때는 그랬어, 우리 여자들은...

“그때는 그랬어. 어디 나만 그랬나. 우리 시골동네에서는 지집애들이 열두 어 살만 넘으면 다들 서울로 부산으로 다들 공장살이 갔잖어. 남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집에서는 더 그랬어. 부지런히 돈 벌어서 남자 형제들 가르치고 없는 살림에도 보태야 하고.
그래서 그 당시 여자애들이 중학교 나온 집은 동네에서 어쩌다 한둘이 될까 말까 손에 꼽을 정도였어. 옛날에는 왜 그렇게 애들을 많이 낳던 것인지. 참말로 미련하게 없는 집에서 자식만 수두룩하게도 많았어.

우리집도 그랬어. 남동생이 셋에다 딸이 넷, 나까지 자식이 일곱인디. 처음 딸만 내리 셋을 낳으니 우리 할매가 엄니더러 대놓고 나가라고 했다더만. 긍게 아들 못 낳는다고 엄청 시집살이를 살은 것인지. 그게 한이 돼 아들을 그렇게 많이 낳은 모양이여. 그러다 봉게 식구들이 세끼 밥먹는 것도 감사할 판에 지집애들이 뭔 학교였겠어.” 

6~70년대 산업화에 밀려 서울로 떠밀려온 설움을 그깟 어묵 한 개에 스스럼없이 털어내는 이씨 할머니는 내친 김에 어린 나이에 올라온 타향살이의 설움까지 쏟아냈다.  

“처음 언니 따라 서울에 올라온 곳이 장안동이었는디, 하필 거기서 남의집살이를 살게 됐어, 나이가 어리니 공장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지. 오매, 그런디 그 집에 내 또래 지집애 하나 있는 것이 어찌 그리도 까탈을 부리고 괄시를 하던지. 내가 다른 건 다 잊어먹고 살아도 그때 고것에게 받은 설움은 내 평생 잊지 못하잖여, 옷을 빨아서 대려주면 잘못 대렸다고 마당에 훌떡 집어던지고...그 집서 한 2년 살다 구로동 봉제 공장에 취직하니까 그제야 숨통이 좀 틔더라고.

구로동 그 시절에...  

그때 구로동은 나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들이 수두룩혔잖여. 남자도 많았고. 거기서 눈 맞아 시집장가도 가고. 야간학교 댕기는 처녀들도 많았고. 그런디 나 댕기는 공장은 주야로 기계를 돌리는 통에 야간학교는 꿈도 못 꾸었어... 암튼 봉제공장 시다로 들어가 미싱(재봉틀)기술자까지 올라가면서 남동생들 학비 다 보태주었는디, 지금은 어디 그 은공을 가들이 생각이나 허가니. 다 저거들이 잘나서 그리 사는 줄 알지...” 

문득 말을 끊고 시무룩해진 이씨 할머니. 그 표정에서 할머니의 젊은날의 고단함이 아닌 지금 당장의 곤곤함이 느껴졌다. 

“여자로 태어난 게 한이지 뭐, 그런디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 여자세상이 됐으니 얼매나 좋아, 우리 딸들도 다 배우고 시집가서 잘들 하고  살어. 나 용돈도 보내주고 철마다 옷도 사주고. 그런디 아들 하나 있는 것이 몸이 안 좋아 약으로만 살어. 어디가 아픈지 병원에 가도 그냥 낫는 것도 아니고. 그리서 가 약값이라도 좀 보탤라고... 

남이 보기는 천덕스럽게 보이기는 해도 이 나이에 큰돈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으니 그냥 나와 보는 것이여. 그렁게 우리 같이 가진 것 없는 사람은 평생 고생만 공생만 하다가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그나저나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도 나는 가뿐하게 들어가 좋기는 헌디, 어쩌까? 야들이 너무 많은디, 시금치로 국도 끓이고 나물도 하고... "

이렇게 대화를 나눈 이씨 할머니와 걸음을 돌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하늘 위로 정월 눈썹달이 생경했다. 아니,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분명 겨울 추위 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는 그런 차가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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