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스승 김준엽선생을 오늘 아침 먼 나라로 보내드렸다.
 
1920년에 태어나 일본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에 재학 중 1944년 1월 일제의 강요에 따라 학병으로 끌려간다. 학병부대는 미얀마 전선에 배치되어 오늘 내일 총알받이가 될 날만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른바 추축국(樞軸國)들은 독일과 이태리 그리고 일본이었다. 이들 나라의 독재자인 히틀러와 무소리니, 도조는 무자비한 살생을 거듭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며 미쳐 날뛸 때였다.

김준엽이 학병으로 갔던 때만 하더라도 일본군은 중국을 선(線)과 점(點)으로 격파하면서 동남아 일대를 도륙내고 있었다. 일군의 만행은 그 뒤에 나타난 것처럼 인간으로서는 차마 거론하기조차 어려운 난행의 연속이었다. 대표적으로 전후에 나타난 것이 731부대다. 북만주를 점령한 일군은 소위 생체실험실을 만들어 놓고 한국독립군, 중국군, 미국군 등 적으로 싸우다가 잡혀온 포로들을 상대로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 참혹한 정경은 그들의 실험일지에 그대로 나와 있으며 전후에 미군이 이를 압수해갔다.

미군은 이 실험의 결과를 자기들의 의학발전용으로 사용하면서 악행을 저질렀던 일본 관계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빅딜을 자행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승자의 만행이다. 아무튼 이러한 험한 시절에 학병으로 끌려간 김준엽은 동경신학교를 다니다가 함께 잡혀온 장준하와 함께 과감히 탈출을 감행한다. 일군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 탈출을 함께한 많은 학생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필사의 도망을 쳐야 했다. 그들의 목표지는 중경 임시정부다. 상해임시정부를 떠나 항주 등지로 쫓겨 다녔던 임시정부는 중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병탈출자들은 우선 복색부터 표가 났기 때문에 인가에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일군에 붙잡히기만 하면 총살이다. 밭을 만나면 닥치는 대로 먹어야 한다. 불을 지피기도 어려우면 생식도 마다하지 않았다. 길은 멀고 험하다. 그렇게 몇 달을 걸었다. 6천리를 걸었으니 삼천리 금수 강산을 두 바퀴 돈 셈이다.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았을 때 그들의 몰골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옷은 낡고 군데군데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먹지 못한 몸이라 피골이 상접했다. 그러나 눈방울만은 또렷했다.

그들의 눈에서는 정기가 빛났다. 일제의 억압을 피하여 이제는 조국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자긍심으로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임시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김구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 요인들은 대환영이다. 특히 광복군 대장 이범석장군은 이들 젊은이들을 끔찍하게 아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본군을 탈출한 그들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웠을까. 더구나 그들은 모두 대학생들이니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간부로 일할 수 있는 높은 식견의 소유자들이다.

장준하는 김구주석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김준엽은 이범석장군의 부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나란히 미군의 조선 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한 OSS훈련에 참가한다.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일본 왕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의 위력에 놀라 지레 무조건 항복을 하는 통에 광복군의 조선반도 상륙작전은 무산되고 만다. 이를 가장 아프게 생각한 이가 김구다. 그는 통곡을 하며 너무 빨리 일본이 항복한 사실에 대해서 통탄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장준하와 김준엽 역시 오랫동안 이를 분하게 여겼다.

이 과정에서 김준엽은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장군의 부관으로 승진하기도 한다. 일본 항복 후에는 ‘49년까지 귀국하지 않고 남경에서 동방어문전문학교의 전임강사로 일하다가 귀국 후에는 고려대 교수로 학교에서 평생을 보낸다. 고대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처음 설립하고 고대의 아카데미 화에 큰 역할을 한다. 나중에 고대 총장이 되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3년 만에 자리를 비켜준다. 장준하와 달리 학교에만 봉직했지만 그는 독재정권에 항상 비판적이었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발간하며 김준엽의 논문을 가장 높이 샀다. 국회의원에 당선하여 박정희정권과 맞섰으며 그로 인하여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되기도 한다. 1975년 8월 장준하는 약사봉 산행 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암살이라는 의심은 굴뚝같지만 지금도 그 진상은 확연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김준엽은 전두환의 후임이 된 노태우정권이 국무총리 직을 제안했을 때 감연히 거부한다. 지금까지 장관직을 거절했다는 사람은 봤어도 총리직을 거절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는 역대정권 하에서 12번이나 벼슬을 권고 받았으나 일절 거부한다. 선비로서의 깨끗한 지조를 끝까지 지킨 것이다. 10년에 걸친 역작으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전5권을 펴냈고 회고록 장정(長征)은 중국과 한국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평생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아니한 김준엽은 말년에 재단법인 사회과학원을 설립하고 후학들을 격려하는데 온 힘을 바친다. 이제 선비는 떠났다. 편안히 잠드시기를 삼가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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