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현지 기자)
5일 합정동의 한 초등학교에 새가방을 둘러맨 어린이들이 교사의 인솔에 따르고 있다.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텐포켓(Ten-pocket)이라는 말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는 말 그대로 아이들에게 열 개의 주머니가 있다는 뜻으로, 에이트 포켓에 지인까지 더하여 아이를 위한 지출을 아끼지 않는 사회현상을 뜻한다.

즉, 우리나라의 저출산 기조에 이러한 신조어까지 생겨났으니 한 아이에 쏟는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만하다. 3월 입학시즌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맞은 조카 입학선물 준비에 주머니가 탈탈 털렸다는 이모· 고모· 삼촌들의 때 아닌 한숨이 들려왔다. 

회사원 유현우 씨는 최근 계획에 없던 거금 40만원을 지출하고는 뒷맛이 씁쓸했다고 한다. 올해 초등학교 들어가는 조카 입학선물 때문이었단다.

“가방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어요. 10만원 안팎이면 눈에 번쩍 띄는 가방을 사주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데리고 나간 조카애가 친구들이 매는 네모난 가방을 사겠다고 해서 봤더니 80만원을 호가하더라고요. 국산도 아니고 외제품에 100만원 이상이 넘는 제품도 있고요. 그래서 삼촌 체면도 있고 중간 가격을 선택했어요.” 라고 말하는 그는 평소에도 조카에게 선물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텐포켓을 이용한 상인들 상술에 걸려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4일 전국 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사진=신현지 기자)

100만원 호가 초등생 가방 없어서 못산다니...

은퇴 공무원 이태수(가명)씨는 올해 손녀 입학 선물로 100만원을 지출했다고 한다. 평소도 하나 밖에 없는 손녀의 장난감이며 옷 등을 선물했던 그는 그 금액이면 초등학교 입학준비를 하고도 넉넉히 남는다는 생각에 뿌듯하기까지 했단다. 그런데 그 금액이 부족했다는 며느리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단다. 초등학생 가방 하나에 100만원이 넘는 돈이라니.

 “아니, 가방이 금으로 만들어졌나요. 초등학생 가방이 100만원이라니요. 처음엔 우리애가 장난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완판되기 전 구입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는 소리에 제가 할 말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도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앞으로 그는 지금껏 손녀에게 쏟았던 비용을 반으로 줄여볼 생각이라고 한다. 자신뿐 아니라 모든 가족이 손녀에게 매달려 과대한 지출을 하는 것이 과연 아이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인지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면서.

그러니까 이 두 사례가 말하는 100만원 가방이란 해외 명품브랜드 구찌와 소노코, 란도셀 등이다. 특히 일본 초등학생 책가방으로 유명한 ‘000’제품은 최하 20만원대에서 비싸게는 100만원이 넘는 고가의 책가방으로 없어서 못 판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는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어디 가방뿐인가. 수십만원대 해외명품 운동화에 어른옷보다 비싼 유명 브랜드 옷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해외 명품 아동복 꾸준한 호황

그 예로 2008년 국내에 진출한 해외 브랜드 아동복 000 제품은 원피스 30~40만원에서 코트는 100만 원대로 백화점 등 쇼핑 유통채널에서 꾸준한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OOO` 겨울 외투는 200만원도 넘는다. 

현대백화점 유아동 상품군 매출도에 따르면 2016년 8.1%, 2017년 10.2%, 2018년 12.9%씩 매년 증가했다. 지난해 8월 압구정본점과 판교점에 입점한 아동 수입의류 편집숍 '한스타일키즈' 매장의 11개 브랜드의 아동의류·잡화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롯데백화점에서도 지난해 9월 잠실점에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에 매장이 있는 프리미엄 유·아동 브랜드 `마르마르`를 입점해 아동 해외명품 신장률은 75.1%에 달성했다. 2017년 본점에 입점한 몽클레어 앙팡, 구찌칠드런, 겐조키즈, 버버리칠드런 등 역시도 여전히 호황이다.  

한 아이를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조부모, 이모 고모 삼촌들, 즉 조카 바보 열풍인 텐포켓(Ten-pocket)현상이 이 같이 백화점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사랑스러운 조카를 위해서라면 금전적인 투자도 마다 않는 경제력을 갖춘 고모, 이모, 삼촌 이른바 골드 앤트(Gold Aunt)들이 증가하면서 이 같은 시류를 만들어냈다는 것.

4일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4일 전국의 6000여 곳의 초등학교에서 2019학년도 입학식이 열렸다. (사진=신현지 기자)

입학선물로 책가방 63% 차지

최근 르까프가 신학기를 앞두고 20대~40대 일반 남녀 14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53%(72명)가 조카에게 선물을 사주었거나 사줄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지인의 아이에게 선물을 사 주었다는 응답도 15%(20명)를 차지했다. 이 중에는 입학 선물로 책가방을 사주겠다는 응답이 63%(90명)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뒤를 이어 2위 문구류 14%(20명), 3위 신발 10%(14명), 4위 의류 6%(8명)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본지가 서울 시내의 한 백화점을 방문했다. 다양한 브랜드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코너에서 직원에게 초등학생 가방 하나를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다. 직원은 먼저 아이의 취향을 묻고는 국내의 OOO 제품을 내보였다. 초등학교 입학 때 장만한 가방은 길게 보면 3학년까지는 사용할 수 있으니 가볍고 어깨 끈이 넓어 편한 것이 좋다면서. 가격대는 신발주머니 포함해 17만 5000원이었다. 

이 가격보다 저렴한 10만원 가격대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 학부모들은 직원들에게 추천을 부탁하기보다는 미리 구입대상을 지정해 두고 그 제품을 보여 달라고 한다고 했다. “보통 가방은 친척분이나 지인들이 사주시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은 대부분 고가의 제품을 찾으세요. 가방 가격도 대충 알고 나오시기 때문에 제품의 디자인만 고민하시고 특별히 어렵지 않게 선택하세요.” 
 
마침 이날 신학기 아이의 학용품을 구입하러 나온 베트남 이주여성 팜씨는 지난해 선물 받은 가방을 아이가 싫어해서 재구입을 했다고 말했다. “저는 작년에 큰애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가방을 시어머님께 선물 받았는데 아이가 가방을 싫어해서 다시 사야 했어요. 학교에서 우리 아이만 그런 가방을 매고 다닌다고 애들이 놀렸나 봐요.

그러니까 아이들 간에도 가방이나 학용품 같은 걸 서로 비교하고 놀리고 그런가 봐요. 저는 그런 걸 잘 몰랐는데. 제 주위에 친한 엄마들도 없고 그러다 보니, 그래서 아이 물건 살 때는 꼭 백화점에 나와서 사요. 아주 비싼 것은 사지 못하지만 비교대상이 될 확률은 좀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서지요.”  

텐포켓(Ten-pocket)현상이 베블렌(veblen effect)효과 불러와

이처럼 어린이아이들 소비 행태가 달라진 것을 일각에서는 텐포켓(Ten-pocket)현상이 또 다른 베블렌 (허영심이 반영된 과시적 소비행태로 고가의 명품물건들은 오히려 가격이 비싸야 더 잘 팔린다는 현상) 효과를 불러온 것이라고 꼬집는다. 꿈을 먹고 커야할 어린이들에게 일찍부터 허영심만을 키워준다면서. 특히 소비의 양극화에 상처를 입을 어린아이들이 심성이 뒤틀려질까봐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합정의 양선희 (가명) 주부는 “우리 나라 저출산율에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는 건 이해가 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특히 그녀는 “아이가 처음 학교에 들어가는 데 명품을 휘감아 양극화를 조장하기보다는 아이들 간에 서로 잘 어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미래를 살아갈 그들에게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라고 지적했다. 

한편 지난 4일 전국 초등학교 6,000여 곳의 입학식이 열린 가운데 저출산 여파로  전남 31곳, 강원 13곳, 충남 10곳 등은 신입생이 1명도 없어 입학식이 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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