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구두수선 24년...꿀릴 건 아무것도 없어

(사진=신현지 기자))
올해로 구두수선하는 일이 24년 됐다는 황남수씨가 구두수선 작업중이다.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 그거 그냥 상대방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이지, 왜 직업이 귀천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요새 세상에는 더 심하지. 누가 구두닦이를 전문직업으로 대우해주겠어요. 그렇지만 멀쩡한 몸으로 빈둥거리는 건 더 부끄럽지 않겠어요.”

지난 6일 여의도 한 빌딩 앞을 지나다 우연히 들른 구두수선코너, 그곳에서 만난 구두수선공 황남수(가명)씨. 그는 분명 직업엔 귀천이 있다며 냉소 섞인 싸늘한 시선을 문밖으로 던졌다. 과시욕과 체면을 우선시하는 우리나라는 그것이 더 심하다면서.

그렇다고 멀쩡한 젊은 몸으로 놀고먹는 건 더 부끄러운 일, 지금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꿀릴 게 없다며 싱긋 웃음이었다. 더욱이 올해 아들이 서울의 유명 국립대학에 들어갔으니 부러울 것도 없다고 은근히 자랑까지 더하는 황씨였다.

구두수선 24년...이젠 부러울 게 없어

황씨 (63세)의 올해로 구두수선 24년, 그러니까 구두닦이 부모를 둔 아들에게 가끔은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다고 말하는 우리사회의 또 다른 ‘무명씨의 하루’를 본지가 엿보기로 했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잖아요. 자식이 잘 되는 만큼 뿌듯하고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나는 못 배우고 못났어도 자식만큼은 잘 되기를 바라는 게 다 부모 맘이잖아요. 내가 워낙 없이 살다보니 장가를 늦게 갔어요.

그러다 보니 나이 40 넘어 아들 하나 얻었는데 그놈이 나를 안 닮고 지 엄마를 닮아 원체 똑똑해요. 없는 집에서 제대로 학원도 못 보냈는데 그리 대학에 척 붙어주고. 그러니 고맙고 미안하지요. 그런데 놈이 하도 성질이 까탈스러워서 자식이라도 조심스러울 때가 많아요.

특히 아빠는 여태 뭐하느라 요 모양 요 꼴로 사느냐며 턱을 치켜 들 때는 저놈이 내 자식인가 하는 생각에 괘씸할 때도 없지 않지요. 그럴 때면 쓴 소주잔으로 속을 달래며 가만히 나를 돌아보는데. 돌아보면 참으로 열심히 살았더라고요. 하루도 쉬는 날 없이, 한 평도 안 되는 박스 안에 갇혀서 숨이 턱턱 막히게 일을 했어요.

어느덧 그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그의 일터 (사진=신현지 기자)

여기 앉으면 하늘이 보이기를 하나, 바람소리가 들리기를 하나 그렇게 20여년을 열심히 구두만 내려다보고 살았어요. 그 덕에 내 이름으로 된 18평 아파트도 한 채 있고. 그런데도 아들의 말이 목에 걸리는 것은 내가 젊은날을 너무 탕진했다는 자책감이지요.“ 라고 서두를 꺼내는 그는 한때 서울역 부근에서 날고뛰던 주먹패였다고.

돈 앞에 이길 장사 없더라

“돈만 있으면 대한민국이 젤로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합디다. 그 말을 바꿔 말하면 돈 없으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게 이 나라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돈 앞에 이길 장사는 없는 거지요.

내 고향은 강원도 두메산골, 화전민이었어요. 그러니 뭔 돈이 있겠어요. 형제는 9남매에다 치매 걸린 할머니까지 대식구가 찢어지게 가난해 감자먹기도 힘들었어요. 겨우 중학교만 나오고 서울에 돈 벌로 나왔어요. 그런데 하필 서울역에서 만난 게 주먹으로 먹고사는 2년차 선배였어요.

그를 따라 간 곳이 강남의 유명 룸살롱, 서울생활 시작을 거기 웨이터로 시작했어요. 당시 웨이터가 여섯인가 됐는데 모두 선배의 수하였던 거지요. 그가 부르면 일을 하다가도 우르르 몰려가 치열하게 싸웠어요. 그렇게 안 싸우면 내가 죽으니까. 맞기도 엄청 맞았고 패기도 엄청 팼어요. 그러다 보니 옥살이로 별을 몇 개씩 다는 놈도 있었고. 밤에 몰래 밀항을 한 놈도 있었고.

그렇다고 겁나는 것도 없었어요. 설사 겁이 난다고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한번 그 바닥에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곳이 그 세계니까요. 당시 삼청교육대로도 많이 잡혀갔어요. 그런데 난 다행히 군대 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그 칼바람은 피했는데 제대를 하고 다시 내 발로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막상 제대를 하고 나니 갈 곳이 없었으니까요. 춥고 배는 고픈데 가방끈 짧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막노동이라. 술집 웨이터만 했던 놈이라 막일은 눈에 안 들어오고. 참 철이 없었지요. 그렇게 내발로 다시 찾아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게 주먹을 휘둘러대다 결국은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는데 죽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지요. 보세요. 그때 입은 흔적이 바로 이겁니다.“라고 내보이는 건 황씨 왼 발의 의족이었다.

건강한 신체로 무엇을 못해...늦게야 깨달음

“그렇게 몸이 망가지고서야 그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는데 그 대가는 참으로 컸어요.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내 다리 하나를 잃고서야 노동이 얼마나 신성하고 고귀한 건지 그때야 깨달았다고요. 사지 멀쩡한 신체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 것인지를. 황소를 때려눕히고도 남을 그런 건강한 신체를 잃고서야 깨달음을 얻었으니 답답하고 한심한거죠.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도 노숙자들 대열에 끼여 있을 게 분명할 겁니다. 그렇지만 아내가 구두 닦는 기술을 배워보라 권유할 때는 내 몸이 그런데도 나를 뭘로 보냐며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런 집사람이 지금은 고맙고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는데 어디 그럽니까.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맘은 그렇지 않은 데 표현을 잘 할 줄 모르니.

아무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요새 아이들 쉽게 돈 버는 일만을 찾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또 고급직종의 일만 찾느라 아까운 시절을 그냥 다 흘려버리는데 한번쯤 깊이 생각을 해보라는 거죠. 자신은 자신이 더 잘 아는 거니까.

그래서 난 우리 아들에게도 항상 얘기해요. 직업에 귀천이 없지 않지만 빈둥빈둥 노는 게 세상 제일 부끄러운 일이니 대학 졸업하자마자 나가 독립하라고. 놈이 까칠하기는 해도 현실을 읽을 줄 아는 놈이니 알아듣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내 과거는 아직은 비밀이라 나중에 저랑 나랑 술 한 잔 기울이는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찌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황씨의 구두수선코너 주위로 어느새 어둠이 희미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빼곡한 빌딩숲에서는 퇴근을 서두르는 걸음들이 이날 따라 유독 경쾌하게 들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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