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 식물을 익초(益草)와 잡초(雜草)로 나누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신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골고루 만들었다. 다만 인간 기준으로 그것을 익초와 잡초로 구별할 따름이다. 그러면 칡이란 식물은 과연 익초인가? 잡초인가? 평가하기란 모호해진다.

칡순을 따먹으면서 산짐승이 산다. 인간도 칡뿌리를 캐다가 즙을 짜거나 달여서 찻물로 내려 먹는다. 이렇게 치면 이는 익초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칡이라는 식물은 줄기가 뻗는 곳에는 반드시 무차별적으로 뿌리를 내린다.

옥토이든, 박토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농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의 논밭으로 뻗어오는 데는 인간의 노역으로 이를 제지하기가 마뜩치 않다. 이른 봄부터 곡괭이나 삽을 들고 칡뿌리를 제거하기에는 농촌에 인력이 전무하다고 하겠다.

농촌에는 고령인구만 살다보니 칡뿌리 제거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알고 있는 듯이 칡은 6·25 전쟁 중에 중공군처럼 밀고 내려온다. 충청도에서는 칡을 가리켜 호근(胡根)이라는 말도 있다.

이 호근 칡뿌리는 노령인구의 약점을 파악한 것처럼 어디든 수륙양용 탱크처럼 농촌의 잡초 즉, 악초가 되어가고 있다. 지자체에는 이 해약을 파악할 직원도 사람도 없다. 그러나 심각성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식물 가운데 사람에게 긴장을 주는 사례가 바로 잡초이다. 잡초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생장하는 특성이 있다. 잡초는 산비탈이나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데에서 군집하여 서식한다. 이 잡초에는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는 습성이 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그 참고 견디는, 즉 역경을 기회로 이용하는 데에 배울 점이 있다. 잡초는 씨앗이 영글게 되면 사람의 신발이나 옷깃에 묻어가는 생리가 있다. 그래서 도시 한 복판 아스팔트 갈래진 틈새에서 씀바귀나 오랑캐꽃, 별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민들레나 별꽃 고들빼기과 씨들은 포자가 바람에 날리는 습성이 있다. 바람에 날려 땅에 닿기만 하면 그곳에 고향을 만들고 잡초와 이웃을 이룬다. 필자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작가로 이중 직업을 가진 현역이다.

이 잡초를 제가하려다 마침내 백기를 들기로 했다. 이들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칡순은 여릴 때 걷어다가 즙을 짜거나 잘게 썰어서 햇볕에 말려서 차를 끓여서 마신다. 그리고 겨울 농한기에 뿌리가 더 자라기에 뽑아다가 썰어서 말린다.

대처에 있는 문우들한테 선물도 한다. 잡초의 생리는 가뭄과 태풍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다. 우리 사람들도 이런 생리를 보고 깨닫게 하려는 신의 계시나 묵시일는지도 모른다.

새봄에 새 출발하는 새내기 직장인, 취업이 어려운 이웃에게 농촌의 잡초 밭에서 너울거리는 봄나비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기를 희원한다. 어제 묶은 밭에서 냉이와 씀바귀를 호미로 캐내면서 잡초의 생리를 배우는데 등 뒤에서 도롱뇽소리조차 음악처럼 들린다.

“잡초 그놈들 참 센 것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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