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도전하는 자의 것...68세에 이뤄낸 꿈의 도전기

국제사이버대학교 최수만 교수 (사진=신현지 기자)
국제사이버대학교 최수만 교수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누구나 생각은 앞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대가 넘어뜨리기 가장 어려운 자신 스스로일 때는 그 승부수를 점치기 어려워 도전은 자꾸만 미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68세의 나이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수만 교수는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환한 국화꽃의 미소로 지난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재미있게 공부했다. 아니, 공부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다. 정말 간절히 원했던 공부였기에 시흥에서 구미까지 달려가는 매일 매일이 내겐 마냥 즐거웠고 행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매일 매일이 어찌 즐겁고 가볍기만 했을까. 더욱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신을 중심에 두기에는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이었을 텐데.

뿐만 아니라 30여 년 회사생활을 마무리한 은퇴자로 이제는 지나온 삶을 관망하며 그 보상심리에 자신 스스로에게 느슨함을 선물할 시기인데.

고등학교 졸업한 38여년 만에 만학에 도전

그러니까 최수만 교수가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는 오기를 품고 만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울산의 언양고등학교를 졸업한 38여년 만인 지난 2010년이었다.

“정말 간절히 공부가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도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던 만큼 솔직히 난 누가 봐도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고 내 스스로도 거대한 야망과 야무진 꿈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집 형편은 너무 가난했고 서울대학을 꿈꾸던 내게 서울행은 아득하고 요원하기만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대학 대신 주산5단 자격증으로 회사에 취직 했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을 그 한 회사에서 꿈을 묻고 오로지 가장으로써 책임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이었다.

더욱이 학력 차별에 대한 괄시와 그에 따른 대우에 직면할 때면 가보지 못한 대학 졸업장의 간절함은 컸다. 알다시피 지금이야 정부의 방침에 기업체들이 드러내놓고 학력 차별로 사람을 평가하는 게 좀 약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엄청났다.

최수만 교수는 '과학적 건물종합관리가 건물사용만족도에 미치는 영향 분석'으로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사진=최수만 교수 제공)
최수만 교수는 '과학적 건물종합관리가 건물사용만족도에 미치는 영향 분석'으로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사진=최수만 교수 제공)

아무리 노력하고 그 결과물이 좋아도 고등학교 졸업자는 승급에서 밀려나는 건 예사였고 급료도 엄청 차이가 났다. 70년 당시 고등학교 졸업자의 월급은 13.000원, 대학졸업자는 55.000원이었으니.

또 무엇보다 노골적인 언사와 무시하는 태도는 배우지 못한 설움을 가중시켰다. 그때마다 난 언젠가는 꼭 그들 앞에 다시 서리라는 다짐을 두며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정작 그 꿈의 도전은 직장의 차별과 온갖 설움을 감내한 퇴직 이후에야 가능했으니. 그만큼 그는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써 꿈을 이루기엔 결코 녹록치 않은 세월이었던 것이다.그런 그에게 무엇이 그의 인생이모작, 즉 이루지 못한 꿈의 도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을까. 

아들의 대학입원 지원서가 꿈의 도전 계기...

“우리 아들이 공부를 참 잘했다. 아들의 대학 입학원서로 학교를 방문했는데, 내 아들이지만 정말 그 녀석이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내 고등학교 졸업장이 훗날 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도 됐고.

그 순간 막연히 갈망했던 생각들이 확연해졌다. 그날 이후 바로 구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물론 집안에서는 다들 반대했다. 다 늦은 나이에 웬 대학이냐며 더욱이 아들 등록금도 마련해야 하고 딸도 있고, 그렇다고 내 결심이 흔들리는 건 아니었다.

평생 가족만을 위해 살았는데 이젠 나를 위해 살아야지 않겠냐는 생각을 가족들은 바꾸지 못했다. 난 그런 가족들에게 장학금을 받겠다고 장담 했고 실제로 장학금을 받았다. 또 알바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수입원을 따로 마련해 나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최소화하려 나름 노력했다. 

시흥에서 인천으로 구미행 버스에 오를 때면 하늘에라도 오르는 기분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정말 즐거웠다. 매일 아침 시흥에서 인천으로 달려 구미행 버스에 오를 때면 하늘에라도 오르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아들 또래의 학생들이랑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그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과대표까지 했으니.

그렇지만 늦은 나이의 공부가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슈퍼마켓을 하는 아내와 교대로 밤 2시가 넘어서야 겨우 공부하는 시간이 주어져 늘 잠이 부족했다. 그런 때문인지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간절히 원하고 기다렸던 것이기에 감동이 배가 됐겠지만, 사회복지전문학사를 받던 날, 그날의 감동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내 생애의 최고의 기쁨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렇게 59세의 나이로 어렵게 대학 공부를 시작한 최 교수는 그 여세를 몰아 국제사이버대학교 경영학부동산학부 부동산학과 편입으로 전체 수석 졸업을 했고 이어 극동대학교 글로벌대학원 석사와 박사까지 깔끔히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현재는 국제사이버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박사학위에 고향의 동문들이 현수막을 걸어주며 축하를 나누었다 (사진=최수만 교수 제공)
고향의 동기들이 현수막을 걸어주며 축하를 함께 나누었다 (사진=최수만 교수 제공)

가장 큰 힘은 교수님의 격려 “가장 훌륭하고 멋진 제자...”

“내가 사회복지전문학사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대학 편입으로 석사에 이어 박사를 취득하게 된 것은 구미대학교 윤덕우 교수님 덕분이다.

그분은 제자 중에 가장 훌륭하고 멋진 제자‘라고 하시며 내가 힘들 때마다 격려와 용기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 말씀이 내게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분, 석사에서 박사까지 지도를 맡아주셨던 김일효 교수님. 그분은 사막에 갖다놔도 농사를 지을 사람이라며 내 늦은 공부에 채찍과 힘을 북돋아 주셨다.

나팔꽃도 감고 올라갈 버팀목이 있어야 꽃을 피우는 것인데 그 교수님이 내게는 지탱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또 끝까지 나를 지켜봐주고 용기를 줬던 47년 우정의 고향 친구들, 그들이 박사학위 받던 날 고향마을 입구에 현수막까지 달아주며 기쁨을 함께 나누어주었다. 정말 모두모두 감사하다.” 

꿈은 도전하는 자의 것...한 발 한 발 꿈으로 향한 걸음이 부디 힘차기를

그러니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의 효과를 최 교수는 이렇게 자신 주위의 사람들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 역시 꿈을 이루고자 도전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격려의 말을 전한다.

“현재 나는 꿈을 이뤄 그 어떤 부러움도 없다. 물론 이를 자랑하거나 과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이 59세에 도전하여 68세에 이룬 나의 꿈의 도전기에 많은 분들이 조금이나마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꿈은 도전하는 자의 것이라는 것을.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모두가 한 발 한 발 꿈으로 향한 걸음이 힘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만학으로 꿈을 이뤄낸 최 교수는 이젠 원도 한도 없다고 말한다. 특히 지난 3년 전부터 국제사이버대학교 부동산학과 강당에서 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순동이 교수로 통하고 있는 지금의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고 한다. 

앞으로도 그는 대학 강단에 남아 지도자의 역할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한다. 또 가까운 시일에는 시집도 낼 계획이라고 한다.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정리해둔 시가 약 2~300여편이 넘는다니 벌써부터 그의 시집이 궁금해진다. 더불어 인생은 60부터라는 그 흔한 말을 최 교수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그말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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