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신수민 기자] 총석정, 금난굴의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들 / 거꾸로 선 바위들과 사선봉 푸른 이끼 낀 옛 돌비석 / 밝으면 아야하는 돌바위를 둘러싼 모습이 이상하다 / 아, 천하 어디에도 없는 절경이러라. / 옥비녀 꽂고 구슬 신발 신은 많은 나그네 / 아! 또 놀러 올 어느 날이 있겠습니까? 

叢石亭 金蘭窟 奇岩怪石 (총석정 금란굴 기암괴석)
顚倒巖 四仙峯 蒼苔古碣 (전도암 사선대 창태고갈)
我也足 石巖回 殊形異狀 (아야족 석암회 수형이상)
爲 四海天下 無豆舍叱多 (위 사해천하 무두사질다)
玉簪珠履 三千徒客 (옥잠주이 삼천도객)
爲 又來悉 何奴日是古 (위 우래실 하노일시고)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경기체가 형식의 관동별곡 9장중 3절의 내용이다.

흔히 관동별곡하면 1580년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을 떠올린다. 그런데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무려 250년 전인 1330년에 지은 같은 제목의 관동별곡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고려 후기 문신인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관동별곡이다.

학창시절 안축의 관동별곡의 매력에 빠져 시인을 꿈꾸던 한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년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꿈을 포기하려는 순간에 거짓말처럼 그 꿈은 이루어졌다. 무려 50여년이 흘러.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그 꿈을 이루는데 50년이 걸렸다. (사진=신수민 기자)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그 꿈을 이루는데 50년이 걸렸다. (사진=신수민 기자)

시인을 꿈꾸던 소년은 평범한 동네아저씨로

안석열 시인(63).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듯한 평범하고 수더분한 동네 아저씨이다. 실제로 그렇다. 그는 안양 시내에서 일반 건축 내장제를 취급하는 일에 종사하는 동네 어르신이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불리는 청소년기는 특히 예민한 시기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는 압박감과 학업에 대한 공포는 지나간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것을 달래는 것 중 하나가 문학에 심취하는 것. 안석열 시인은 그렇게 시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았다. 시 중에서도 특히 그는 고시(古詩), 그 중 안축 선생의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몇 수백 번씩 되뇌고 되뇌었다한다. 마치 찬송가나 불경을 암송하는 것처럼.
 
시인의 꿈은 군대시절에서도 계속된다. 77~78년도 군 생활 기간에도 그는 시작활동을 펼쳐 당시 전우신문에 시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제대 후 삶에 치여 그에게 시는 언감생심, 결코 같이 공존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의 꿈은 멀어지는 듯 했다.

소년의 꿈…50년이 흘러 이루어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신사동 성베드로 성당에 다니게 되면서 그곳에서 활동 중이던 ‘옹기문학회’를 만나게 된다. 잊혀져갔던 시상이 다시 떠오르고 그는 옹기문학회에서 시창작을 하며 과거의 아쉬움을 달랜다.

하지만 시를 접하면 접할수록 시에 대한 욕심과 창작에 대한 열망은 계속 커져만 갔다. 그것은 자존심이고 자신에 대한 신념이었다. 비록 시인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지만 자신이 쓴 시가 다른 이들에게 혹평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했다.

글을 쓰는 것이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어’ 하다 보니 어느새 작가의 언저리에 와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스스로 다짐을 한다.

“그래 비록 시인은 아니더라도 내가 쓴 시가 다른 이들에게 시 같지도 않은 시라는 말은 듣지 말자”

그리하여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시창작 활동에 돌입한다. 한가정의 가장으로 삶의 현장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시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서평 비평집을 참고하면서 시창작 활동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부족한 무언가가 계속 자신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결국 그와 교류하고 있던 지인들의 조언 속에 한국의 대표 시인중 한명인 박제천 선생의 문학아카데미에서 시작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방통대 국문학과에도 편입한다.
 
기회는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런 그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지인의 추천으로 문학지 「문학앤문화」에 시를 보낸 것이 덜컥 당선된 것이다. 

제2의 인생…다시 시작된 시인의 하루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나이에 그는 이제 시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의 시세계는 자연친화적이 낭만적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는 그가 청소년기에 유난히 좋아했던 근재 안축의 시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이와 관련, 박종민 수필가는 안석열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과 정서(情緖)와 안목(眼目)을 초월한 세대라 할 만큼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수성이 예리하면서도 차분한 감성(感性)과 시각(視覺)을 지녔다”고 평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온갖 사물을 보고 느껴 글로 표출해내는 능력과 솜씨가 순수하면서도 수수하고 구김감이 없다고 한다. 즉, 사물의 형상과 면모를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자 하는 소소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이라는 것이다.

박 수필가는 “정서적 맛깔을 살려내는 감성적(感性的)인 시(詩)로서의 비유(比喩)와 은유(隱喩)를 모토로 한 서정성의 시라기보다는 짧고 가벼운 정형적 서사시에 바탕을 둔 직유(直喩) 플롯이 훌륭하고 평하고 싶다”고 말한다.

안석열 시인의 꿈은 소박하다. 이왕지사 시인의 문턱에 들어섰으니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그린 책을 만들고 싶다는 것. 그것을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이 보고, 듣고 하면서 최소한 시인이라는 이름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이가 되고 싶다한다.

늦은 출발. 하지만 그 출발은 어쩌면 더 넓이, 더 높이 뛰기 위한 인고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 안석열 시인에게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