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독립선언서 한자리에...‘서울과 평양의 3·1운동특별전’
100년 전 독립선언서 한자리에...‘서울과 평양의 3·1운동특별전’
  • 신현지 기자
  • 승인 2019.03.29 12: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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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본, 간도. 연해주 등 10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 신문관판’ 원본 처음으로 선보여
서울역사박물관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사진=시현지 기자)
서울역사박물관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사진=시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10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을 모르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초등교육을 받은 이후라면 100년 전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비폭력 만세운동에 대해 모르는 국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아픔은 희석되는 것, 역사를 되짚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의 지표가 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재현해보는 시간이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울과 평양의 3.1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침탈과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조선의 독립과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 비폭력 만세운동을 벌였던 과정,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까지 서울역사박물관이 100년 전 3.1운동을 세밀하게 펼쳐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펼쳐진 이번 전시는 먼저 서울은 3.1운동이 기획되고 시작된 곳이며, 평양은 서울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이 전개된 곳임을 주시한다. 

3.1운동의 기획...서울에서 완료

전시는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3·1운동의 기획 부분은 서울의 북촌을 중심으로 3·1운동의 기획과 독립선언서의 인쇄 및 배포과정이다. 즉, 100년 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의 독립투사들은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사진=신현지 기자)
(사진=신현지 기자)

하지만 그 효과에 반해 탄압과 감시만 심해졌고 이런 상황에 1918년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민족의 운명은 민족 구성원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결주의가 조선에 전해지자 여운형을 비롯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기회로 삼는다.

세계의 움직임에 힘입어 조선이 독립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일본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먼저 독립선언을 외쳤고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국내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개최하기로 의기투합하여 3.1운동의 모든 준비는 서울에서 완료하게 됐다.  

2부의 3·1운동의 실행에서는 서울과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을 날짜별로 사진과 유물을 통해 소개한다. 이를 전개하면, 서울에서 완료한 독립선언식을 바탕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 고양 평양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해주9개 도시에서 만세운둥이 불처럼 번졌다.

서울에서는 오후 2시 종로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고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같은 시각 평양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로 연대하며 행진을 이어 나갔다.

지역 신분 계층을 넘어 도시에서 농촌으로 산간벽지로 구석구석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1920년 3월까지 이어지는데 국외 동포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사진=신현지 기자)
(사진=신현지 기자)

3부에서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호題號를 지키며 발간된 ‘조선독립신문’과 만세운동의 참여를 독려하는 수많은 격문들을 소개한다. 지하신문과 격문은 만세운동을 확산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독립선언서와 함께 인쇄된 <조선독립신문>은 귀성객의 짐 속에 담겨 전국으로 전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대신해 이 신문을 읽고 거리행진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 밖에 ‘국민회보’ ‘신조선신문’ ‘자유민보’ ‘국민신보’‘국민신문’등 1919년 3월부터 7월 사이에 발행된 신문이 30여 종이 넘었다.

이 산문은 여러계층이 읽을 수 있도록 한문체 문장뿐 아니라 순 한글로 작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신문은 만세운동이 참여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발행한 것이다.

4부에서는 만세운동 중에 체포된 사람들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법원의 판결을 받아 구속된 일련의 과정을 소개하는 ‘감시와 탄압의’ 장면으로 일제의 잔혹한 탄압의 증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일제는 우리의 3.1운동을 가옥하게 탄압했다. 경찰 헌병과 함께 소방대원들도 나서 총과 칼로 갈고리까지 휘둘러 이 과정에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특히 4월에는 추가로 4천여 명의 중무장 한 군인들을 일본으로부터 파견하여 전국에 주둔한 독립운동을 샅샅이 체포했다.

그리고 체포한 투사들을 경무총감부와 종로경찰서에 나누어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또 이후에는 우리의 투사들을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하여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한 양한묵 유관순, 등 많은 사람이 옥중에 사망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당시 3.1운동 수감자는 46.948명 부상자는 15.961명이었고 그 안에서 7.509명이 사망했다. 

국내. 일본, 간도. 연해주 등 10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독립선언서...

이처럼 이번 전시는 3.1운동의 전개과정은 물론  국내, 일본, 간도, 연해주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가 10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조소앙 선생의 ‘대한독립선언서’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에서 발표한 두 장의 ‘독립선언서’,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보관중인 ‘기미독립선언서 신문관판’이 원본으로 처음 이 자리에서 소개되었다.

또한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작성해 보고용으로 총독과 육군대신에게 보낸 ‘3·1운동 계보도’와 상하이의 신한청년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과 민족대표 48인의 판결문 등을 묶은 ‘원비잔몽圓扉殘夢’,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 선생의 유품, 1946년 해방 후 처음으로 열린 3·1운동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이응노 화백의 ‘3·1운동’ 그림도 함께 선보였다.

평양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나인협 선생의 유품 19점과 평양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이자 의사 부부인 홀 부부가 가지고 있던 평양지도그림인 ‘기성도箕城圖’, 장대현교회, 남산현교회 등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이 시작된 장소의 사진 등도 전시되었다.

송인호 서울역사박물관장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3·1운동이 어떻게 준비되고 실행되었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다.” 라며 “국내, 일본, 간도, 연해주에서 발표된 중요한 독립선언서가 10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의미가 있는 자리가 되는 만큼 백 년 전 서울과 평양의 역사현장에 서서 그 함성과 기억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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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2019-03-29 15:05:12
우리는 일제의 36년 식민지,참혹한 만행과 수탈을 잊어서는 않된다. 또한번 일제의 노예가 될수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