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2로 결론
2020년 안에 법 개정 안 되면 효력 상실
임신 초기 낙태 전면 금지에 철퇴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가치둬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한 쪽에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또 한 쪽에서는 태아의 생명권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헌법재판소 앞 풍경이었다. 결론은 전자의 승리다. 대한민국도 세계적인 조류와 시대적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헌재는 11일 14시50분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269조와 270조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유남석 헌재소장을 포함 헌법재판관 7(서기석·이선애·이영진·이석태·이은애·김기영)대 2(조용호·이종석)로 낙태죄의 위헌성이 인정됐다. 헌재는 2020년 12월31일까지 법 개정을 권고했고 만약 그때까지 국회가 손을 보지 않으면 낙태죄 조항은 그 즉시 효력을 상실한다. 

왼쪽부터 서기석 헌법재판관,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조용호 헌법재판관이 착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보통 헌재의 결정은 △합헌(법 조항 유지) △위헌(법 조항 바로 효력 상실) △헌법 불합치(시한을 두고 그때까지는 현행법의 효력이 유지되나 이후에는 효력 상실) 등이 있다. 

헌재의 판단 요지는 임신 초기의 낙태를 전면 금지해놓은 현행법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2012년 합헌 판정 이후 7년 만이고 1953년 낙태죄가 제정된지 66년 만이다. 낙태죄 폐지에 보수적인 자유한국당이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20대 국회의 임기 안에 법 개정이 수월하게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임신 8주 이내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낙태죄 폐지에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일찍부터 헌법재판소 주변에 모였다. 경찰 병력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형법 조문을 보면 이렇게 돼 있다. 

269조 ①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③2항의 죄를 범하여 부녀를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70조 ①의사·한의사·조산사·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없이 낙태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③1항 또는 2항의 죄를 범하여 부녀를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④3항의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269조 ①을 자기낙태죄라 부르고 270조 ①은 동의낙태죄라고 칭한다. 2017년 2월 동의낙태죄로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가 헌법소원을 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게 됐다. 

(사진=박효영 기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진=박효영 기자)

이미 낙태죄는 사문화된 법이었고 수사기관에서도 따로 단속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성이나 의사가 입건되는 경우는 절대 다수가 상대 남성의 보복성 고발에 기인했다. 한 마디로 낙태 수술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자행돼왔다. 그래도 형법상 범죄 상태에서의 낙태 수술은 공식 의료 기록으로 남기기도 어려웠고 비용과 안전 등 여성에게 위험을 강요해왔다.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여성의 고통 이전에 태아의 본질적인 생명권에 초점을 맞췄다. 2012년과 달리 이번에는 “낙태죄 폐지는 살인 방조”라는 구호가 자주 보였다. 헌재도 시간상 태아의 발달 단계와 무관하게 원천적으로 낙태를 금지해도 될 만큼 태아의 생명권을 절대적으로 상정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정 기간 이전의 태아를 희생시키더라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가치로 여겨졌다. 

예컨대 헌재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 했고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석태·이은애·김기영 헌법재판관은 “낙태죄 규정이 곧바로 폐기되더라도 극심한 법적 혼란이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형법 조항과 무관하게 이뤄지고 있는 낙태 수술의 현황을 고려한 판단으로 해석된다. 

반대로 조용호·이종석 헌법재판관은 “낙태죄 규정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어느정도 제한되지만 그 제한의 정도가 낙태죄 규정을 통해 달성하려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중대한 공익에 비해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며 개별 의견을 밝혔다. 

(사진=박효영 기자)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진=박효영 기자)

당장 극소수지만 낙태죄로 기소되거나 입건된 피고인·피의자들은 무죄 판결이나 기소유예 결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낙태죄로 처벌받은 사람들도 줄줄이 재심 청구를 할 가능성이 있다. 

정치권에서는 한국당을 뺀 4당(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이 존중과 환영의 입장을 냈다. 

특히 정의당은 정책위원회 명의로 논평을 내고 “(낙태죄는) 여성을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인구조절 정책의 도구로 통제하고 규제의 대상으로 삼아온 역사”라며 “형법에서 낙태죄를 폐지할 것이다. 자기낙태죄와 동의낙태죄의 규정을 삭제해 낙태의 죄를 지울 것이다. 또한 모자보건법을 개정해 임신 초기에는 사유를 불문하고 임부의 동의만으로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하도록 하고 해당 수술의 허용 사유에 사회경제적 이유를 포함하고 현행 모자보건법이 허용하는 사유(24주 이내 인공임신중절 허용)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원치 않는 임신의 예방, 의료접근권 보장, 비혼모 또는 한부모 가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 등 다양한 노력이 낙태죄 폐지와 함께 가야 한다. 여성과 태어날 아이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는 본연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해서 이승한 작가는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신체적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결정을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을 안다. 그들이 죄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결정이 내려진 게 더 없이 기쁘다”고 밝혔다. 

(사진=박효영 기자)
66년 만에 낙태죄가 종언을 고하게 됐다. (사진=박효영 기자)

김현성 작가는 “대한민국에서 낙태죄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었다”며 “과거에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위한 도구에서 임신 중절 시술 버스가 동네마다 돌아다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8~90년대 많은 여아가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해 임신 중단의 대상이 됐다. 결국 낙태죄는 그 시작부터 권력과 가부장제의 입맛에 맞게 사용되거나 또는 간편하게 무력화된 그야말로 전근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녹슨 무기”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근대의 녹슨 무기답게 현행 낙태죄는 임신과 그 중단의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뒤집어 씌워왔다. 기본적으로 임신은 여성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닌 만큼 남녀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책임의 일부는 국가에서 이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행 낙태죄상 남성이 함께 책임을 지고자 여성의 임신 중단 비용을 보조할 경우 형법 제269조와 270조에 의거 종범으로 처벌받고 심지어 병원에 동행만 해도 처벌 근거로써 작용할 수 있다. 임신과 그 중단의 책임에서 남성을 법률이 강제로 배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경찰은 고발이 접수되면 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법원이나 검찰에서 다양한 사정을 참작해 기소유예 또는 선고유예로 마무리짓기는 하지만 법적 분쟁에 한 번이라도 휘말려 본 사람은 이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지 알 것이다. 특히 상당수의 낙태죄 고발 접수가 여성과 관련 있는 남성 또는 그 가족으로부터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은 이 녹슨 무기가 아직도 위력이 강함을 입증할 뿐”이라며 이번 헌재 결정의 의의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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