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장과 허장환의 증언
전두환의 조직적 범죄
39년만의 결심
아직 특조위도 구성 안 돼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1979년 12월12일 쿠데타로 군부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씨와 하나회는 저항하는 시민들을 짓밟아야 했다. 전두환씨가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그렇게 위급 상황을 유도한 것은 물론 실제 광주에 내려와 총격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증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장씨(미국 육군 501정보단 요원 출신)는 지난 3월14일 방송된 jtbc <뉴스룸>에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씨가 이미 (광주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작전을 모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용장씨와 허장환씨가 39년 만에 5.18의 진실을 폭로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씨와 함께 허장환씨(보안사령부 소속 505보안부대 수사관)는 13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5.18 당시 △전씨가 광주에 와서 직접 사살 지시(5월21일) △사복 군인의 교란 작전 △학살하기 위한 시나리오 기획 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광주 항쟁은 신군부에서 만들어온 시나리오에 의해 일어났다”며 “대구와 부산은 자기네 고향이자 규모가 커서 배제됐고 대전은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위험 요소가 있다. 목포는 규모가 작고 남쪽에 치우친 위치가 작전상 어렵다”고 밝혔다.

1979년 10월26일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의 우두머리는 누가 뭐래도 전씨(보안사령관·중앙정보부장·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육군 대장·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다. 

그동안 전씨는 △반란 수괴(12.12) △초병 살해 △내란 수괴(5.17 쿠데타) △내란목적살인(5.18 민주화운동) △일해재단 비자금 조성(9500억원) △국방부 5.11 연구위원회 결성(광주에서 자행한 만행을 덮고 왜곡하기 위한 대대적인 선전 선동) 등 온갖 중대 범죄의 총 책임자로 지목됐음에도 감옥(1995년 12월3일~1997년 12월20일)에서 금방 풀려났다. 이후에도 전씨는 “광주는 폭동”, “전재산 29만원”,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조비오 신부는 사탄”, “민주화의 아버지(부인 이순자씨 발언)” 등 전혀 반성하지 않고 망언만 반복했다.

전두환씨와 그의 아내 이순자씨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특히 전씨와 비호 세력은 광주 학살 문제에 대해 △자위권 발동 △북한 특수군 개입 등 얼토당토 않은 유언비어를 유포해왔다. 

하지만 김씨에 따르면 전씨가 5월21일 정오 즈음 광주전투비행단에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최종적인 작전 회의를 했다. 직후 딱 1시간이 흘러서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 김씨는 전씨가 자위권 차원의 발포 명령이 아닌 광주시민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실제 광주시민들은 13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11여단 61대대 계엄군에 의해 집단 발포가 자행됐다. 1차 집단 발포 2차 조준 사격이었다. 국군의 총에 맞아 자국민 55명이 사망하고 500명 넘게 부상을 입었으니 전씨의 지시에 의한 사살 명령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5.18 특별법(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2018년 2월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었던 것도 2017년 내내 △헬기 사격 △전투 폭격기 출격 대기 △집단 성폭행 등 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만행들이 어느정도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당시 신군부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야당 지도자인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거하고자 내란 음모를 엮어내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김 전 대통령의 내란 조작과 80년 서울의 봄 대학생 시위 조직을 연결시키고 그 연장선상에서 5.18 민주화운동과 연루시켰다(KT 공작)는 것이다. 

허씨는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했는데 사복을 입고 작전을 수행한 △유언비어 유포조 △장갑차 탈취조 △무기고 탈취조 등에 대해 구체적인 증언을 했다. 

더 나아가 허씨는 5.11 연구위원회의 악행에 대해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고 큰일 났다 싶어서 그걸 감추고자 5.11 분석대책반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보안대원만으로는 부족해 법조인과 각 부처 연구위원까지 차출해 광주 문제를 희석했다. 기록의 역사는 언제든 변조될 수 있는데 광주 문제가 그런 식으로 39년이 흘렀다. 필연적으로 광주를 타깃 삼아 5.18을 엮었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허씨는 이제 와서 폭로하는 것에 대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허씨는 당시 전씨의 조직적인 범행을 증언했고 김씨는 미국 정보당국에 그 사실을 파악해서 보고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소속으로 각자 겪은 바에 대해 일치된 증언을 했다.

김씨는 “내가 쓴 보고서 가운데 5건은 백악관으로 들어갔고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이중 3건을 직접 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가 써 보낸 보고서를 미국 정부가 원형 그대로 우리 정부에 보내주도록 문재인 대통령이 요청하기를 부탁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씨가 39년 만에 비밀을 풀어냈던 배경에 대해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4일 방송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그분이 39년 동안 가슴에 묻고 있었던 자기 표현으로 십자가라고 했다. 십자가를 이제는 내려놓고 싶었다. 뭔가 이제는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라고 전했다.

더 나아가 박 의원은 “이건 모두 다 의도를 두고 광주를 폭동의 도시로 만들어서 무력 진압을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권력을 잡겠다는 그런 기획으로 움직여진 것인데 사실 그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초기에는 그들의 의도대로 충돌, 방화라든지 이런 게 있었는데 나중에 가니까 광주시민들이 무기를 회수하고 완전히 평화로운 치안 유지를 하는 것”이라며 신군부의 계획성을 풀어냈다.

즉 “그래서 기획자들이 깜짝 놀라서 이걸 더 이상 끌어선 안 되겠다고 해서 5월27일 도청을 무력 진압하게 된다는 게 허씨의 증언인데 이걸 김씨가 미국에 보고한 내용이 완벽하게 뒷받침해 주는 그런 내용이라서 딱 아귀를 맞춰준 것”이라는 요지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13일 전격 개최된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특별 기자회견. (사진=연합뉴스 제공)

실제 5월21일 국군의 집단 학살 이후 광주시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해서 무장했다. 하지만 무기 반납을 주장했던 온건파와 계엄군의 굴복을 요구했던 강경파가 대립한 끝에 25일까지 4500정의 총기를 회수했다. 그 이후 범시민궐기대회가 진행되는 한편 시민군은 계엄군 및 광주시장 등과 협상을 했고 여전히 항쟁의 열기는 거셌지만 시민군의 조직력은 약화됐다. 결국 5월27일 도청에서 시민군은 완전히 진압됐고 5.18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자유한국당이 올초 지만원씨 등 부적절한 인사 추천 파동을 일으키고 5.18 망언으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지만 아직도 특별법에 따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지 못 하고 있다. 

박 의원은 김씨·허씨의 증언이 가져올 효과성에 대해 “특조위(5.18 특별법에 의한 특별조사위원회)가 아직 구성조차 되지 않았는데 특조위 활동에 굉장히 중요한 동력을 부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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