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노무현의 길
가장 보수적인 부시 대통령이 온 이유
주권자로서 시민들의 성찰 능력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정치적 불이익이 눈 앞에 예상되지만 그 길을 걸어갔던 정치인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흘렀다.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은 노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추모하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노무현”을 천명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10주기 추도식이 23일 14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치러졌다. 추도식에는 일반 시민, 노 전 대통령의 아내인 권양숙 여사, 김정숙 영부인,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문희상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 5당 지도부, 광역단체장 등 1만여명이 참석했다.

주요 내빈을 포함 수많은 사람들이 찾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식. (사진=연합뉴스 제공)

유 이사장은 10년간 슬픔과 애도의 기간을 거쳤다면 이제 그의 가치를 누구나 일상 속에서 고민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무현”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강조한 바 있다.  

이를테면 노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건호씨는 “아버님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신념으로 정치적 삶을 채우셨다. 깨어있는 시민 그리고 그들의 조직된 힘에 대한 믿음은 고인께서 정치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신조였다”며 “아버님은 우리 국민들이 이뤄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셨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노 전 대통령은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대리인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넘어 주권자로서 시민들의 성찰하는 힘을 유일한 정치적 대안으로 강조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한 “행동하는 양심”과 일맥상통 하는 개념인데 정치인과 정파의 행태에 대해 시민들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할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신념에 따른 참여와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참여 정부”로 불렸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노건호씨가 유족 대표로 인사말을 건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같은 날 아침 열린 상무위원회에서 새로운 노무현의 모습과 가치에 대해 △정치 개혁가(승자독식의 선거제도 개혁 및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출마 결단) △국가 비전의 기획가(인기를 끄는 단기책이 아닌 장기적인 복지국가의 틀 설계) △성찰자(노동 정책에 대한 본인의 실책을 인정) 등 3가지로 해석했다.

재임 기간 내내 카운터파트였던 부시 전 대통령은 추도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을 (초상화로) 그릴 때 인권에 헌신한 노 전 대통령의 행보를 생각했다”며 회상을 풀어냈다.

이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를 세세히 묘사했는데 “친절하고 따뜻한 노 전 대통령을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했던 그를 그렸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용기있게 내는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그렸다. 여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노 전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목소리를 냈다. 아주 겸손했던 그를 그렸다. 그의 훌륭한 성과와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가치, 가족, 국가 그리고 공동체였다”고 강조했다.

사실 부시 전 대통령은 공화당 소속으로 강력한 보수 정치인의 행보를 보였고 노 전 대통령과 그리 조화로운 정치 철학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노 전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중시했던 오바마 전 대통령과 어울릴지 모른다. 그럼에도 노 전 대통령은 한미 관계라는 냉엄한 제1의 국제사회적 현실을 넘어서서 부시 전 대통령으로부터 탄복을 이끌어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저희는 물론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한미 동맹의 중요성이란 공유된 가치보다 우선하는 차이는 아니었다. 우리 둘은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열심 노력했다”고 밝혔다. 

부시 전 대통령(오른쪽)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노씨(왼쪽), 권양숙 여사(왼쪽에서 두 번째), 김정숙 영부인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참여 정부는 부시 정부와 추진했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이라크 파병 등으로 국내 지지층으로부터 커다란 곤욕을 겪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의 원성에 직면하더라도 매기론(강력한 경쟁자의 존재로 자기 자신의 경쟁력을 상승시키는 효과)에 확신했고 남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미국의 협조를 이끌어 내려고 과감하게 결단했다. 

정책적 결단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리지만 노 전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던지려고 애썼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보수적인 미국 대통령과도 잘 지내야 하는데 부시 전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방문했으니 그 노고를 어느정도 인정받은 셈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맑스 베버는 정치인의 덕목으로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을 내세웠는데 노 전 대통령은 3가지 덕목을 균질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대통령에 오른 뒤 ‘책임의 정치’와 ‘신념의 정치’ 중 전자에 주로 복무했다. 전체 대한민국의 조화로운 이익을 위해 책임지는 자세로 사안을 바라봤는데 그렇다고 신념과 당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부시 전 대통령과 인사하고 있는 이낙연 국무총리(왼쪽)와 문희상 국회의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문 의장은 “국민장으로 치러지던 이별의 시간 동안 수 백만의 국민은 뜨거운 눈물과 오열 속에 저마다 내 마음 속 대통령을 떠나보내야 했다. 반칙과 특권에 맞서 싸웠던 나의 대리인을 잃은 절망이었을 것”이라며 “노무현이 걸었던 그 길은 국민 통합의 여정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2000년 4월13일(16대 총선 때 당선이 보장된 서울 종로구를 포기하고 부산 출마)은 바보 노무현의 시작이었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문 의장은 3당 합당을 반대하고 지역주의 타파와 동서 화합을 추구했던 노 전 대통령을 떠올려봤을 때 “이분법에 사로 잡힌 우리의 정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질 뿐”이라고 자성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부시 전 대통령이 그린 초상화. (사진=노무현재단)

어찌보면 이상과 현실의 고민 속에서 치열하게 이상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의 행보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최초 정치인 팬카페 노사모 결성/민주당 비주류로서 대선 경선 대역전극)시켰고 결과적으로 현실 권력을 쥐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총리는 “대통령께서는 생전에 스스로를 봉화산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연결된 산맥이 없이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산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대통령은 결코 외로운 산이 아니다. 대통령 뒤에는 산맥이 이어졌다. 봉화산은 하나가 아니다. 국내외 수많은 봉화산이 솟았다”고 역설했다.

이어 “대통령의 생애는 도전으로 점철됐다. 특히 지역주의를 비롯한 강고한 기성 질서에 우직하고 장렬하게 도전해 바보 노무현으로 불릴 정도였다. 대통령은 저희가 엄두내지 못 했던 목표에 도전했고 좌절을 감당했다. 그런 대통령의 도전과 성취와 고난이 저희들에게 기쁨과 자랑, 회한과 아픔이 됐다. 그것이 저희를 산맥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이 총리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못 다 이룬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꿈꾸던 세상을 이루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저희들은 그 길을 가겠다. 대통령을 방해하던 잘못된 질서도 남아 있다. 그래도 저희들은 멈추거나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안치된 너럭바위에 참배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유 이사장은 10주기 추모의 큰 방향을 잡고 전국을 돌며 행사를 진행했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모친상을 당해 이날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 했다. 

대신 참석한 정영애 노무현재단 이사는 “대통령의 마지막 당부처럼 이제는 슬픔, 미안함, 원망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남긴 과제를 실천하고 실현해야 할 때”라며 “10주기를 계기로 그의 이름이 회한과 애도의 대상이 아닌 용기를 주는 이름, 새로운 희망과 도전의 대명사로 우리 안에 뿌리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추도식은 유정아 전 노무현 시민학교 교장의 사회로 △국민의례 △유족(노건호씨) 인사말 △추모 영상 상영 △부시 전 대통령·문 의장 추도사 △가수 정태춘씨 추모 공연 △이 총리 추도사 △정 이사 맺음말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추모 공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참배 순으로 진행됐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