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19혁명 51주년 기념식장에서 벌어졌던 이승만 기념사업회 측의 사과해프닝 이후 많은 사람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추종자의 주도세력은 이승만 기념사업회지만 그들은 표면에 나타난 단체로서의 이름일 뿐 보수 우익을 자처하는 유명 인사들도 상당수 포진하고 있다.
그 분들은 대부분 ‘이승만’ 이라는 인물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특히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강한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 집권시절 우리는 개인숭배 비슷한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가 12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사이 필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4.19혁명 당시에는 대학 3학년이었으니까 학교교육의 대부분을 이승만 치하에서 받았다.
이승만 집권시절 우리는 개인숭배 비슷한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가 12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사이 필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4.19혁명 당시에는 대학 3학년이었으니까 학교교육의 대부분을 이승만 치하에서 받았다.
교실에는 이승만대통령의 사진을 걸었다. 공공연히 국부(國父)로 호칭했다. 어린 마음에 이승만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내가 살던 전주(全州)에 대통령이 온다고 해서 전주역으로 마중 나갔던 기억이 있다.
그는 특별열차 맨 뒤 칸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들과 중고등학교 형들이 어울려 기차선로에 섰고 많은 일반인들이 모였다. 먼발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친견(親見)을 한 셈인데 대통령 얼굴을 한 번 봤다는 것만으로도 얘깃거리가 될 만큼 국부다운 카리스마를 겪어야 했다. 요즘 북한의 김정일이 중국을 가더라도 흔해빠진 비행기를 못타고 기차로 다니는 모양새를 보면서 60년 전의 이승만을 떠올리곤 한다. 이승만은 일흔 넷에 초대대통령이 된 사람이니까 그 때로서는 극노(極老)에 속했다.
게다가 타고난 권위의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했다. 누구나 그의 앞에만 가면 주눅이 들었고 올바른 진언을 하기는 어려웠다. 임기 말이 되면서 수많은 정치적 파동을 일으켜 정국을 긴장시키면서도 그는 야당과 대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명령일하에 모든 것을 자신의 주관대로만 끝내려고 했다. 노인들에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완고(頑固)였다. 이를 잘 이용하여 후계구도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이기붕이다. 그의 부인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외국인 부인인 프란체스카에게 들락거리고, 이기붕은 대통령과만 상대했다.
이기붕은 건강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옆에서 부축을 하지 않으면 소파에서 일어나는 것도 불편해 했다. 그러면서도 권력욕은 굴뚝처럼 달아올라 이승만을 둘러싼 온갖 잡음의 중심에 이기붕이 있었다고 폄하된다. 더구나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일가 권총자살이라는 비극을 연출함으로서 이기붕은 영원히 민주혁명의 적으로 낙인 찍혔다.
그는 특별열차 맨 뒤 칸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들과 중고등학교 형들이 어울려 기차선로에 섰고 많은 일반인들이 모였다. 먼발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친견(親見)을 한 셈인데 대통령 얼굴을 한 번 봤다는 것만으로도 얘깃거리가 될 만큼 국부다운 카리스마를 겪어야 했다. 요즘 북한의 김정일이 중국을 가더라도 흔해빠진 비행기를 못타고 기차로 다니는 모양새를 보면서 60년 전의 이승만을 떠올리곤 한다. 이승만은 일흔 넷에 초대대통령이 된 사람이니까 그 때로서는 극노(極老)에 속했다.
게다가 타고난 권위의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했다. 누구나 그의 앞에만 가면 주눅이 들었고 올바른 진언을 하기는 어려웠다. 임기 말이 되면서 수많은 정치적 파동을 일으켜 정국을 긴장시키면서도 그는 야당과 대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명령일하에 모든 것을 자신의 주관대로만 끝내려고 했다. 노인들에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완고(頑固)였다. 이를 잘 이용하여 후계구도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이기붕이다. 그의 부인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외국인 부인인 프란체스카에게 들락거리고, 이기붕은 대통령과만 상대했다.
이기붕은 건강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옆에서 부축을 하지 않으면 소파에서 일어나는 것도 불편해 했다. 그러면서도 권력욕은 굴뚝처럼 달아올라 이승만을 둘러싼 온갖 잡음의 중심에 이기붕이 있었다고 폄하된다. 더구나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일가 권총자살이라는 비극을 연출함으로서 이기붕은 영원히 민주혁명의 적으로 낙인 찍혔다.
이 때문에 지금 이승만 추종자들은 모든 덤터기를 이기붕에게 뒤집어씌우고 이승만은 고고한 지도자로 평가하려고 분투노력 중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회과학적인 접근방법으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좁혀야 한다.
일반 범죄의 경우 피의자가 죽으면 더 이상 소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치와 역사의 경우에는 당사자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러한 사건이 생기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두고두고 점검을 받는다. 여기서는 생사와 상관없이 모든 관계자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 흔히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바로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의 잘잘못이나 평가를 어느 일방에게만 불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기붕이 3.15부정선거를 획책한 장본인임은 틀림없지만 이승만은 이를 몰랐단 말인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 총칼로 사살한 사건은 이승만의 책임이 아니란 말인가. 이에 대해서 이승만 추종자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합창한다.
이기붕이 3.15부정선거를 획책한 장본인임은 틀림없지만 이승만은 이를 몰랐단 말인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 총칼로 사살한 사건은 이승만의 책임이 아니란 말인가. 이에 대해서 이승만 추종자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합창한다.
“이승만대통령은 이기붕 일당이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것도 몰랐고, 4.19혁명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것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말은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음을 빗대어 강조하는 말이 된다.
당선이 확실한데 무슨 부정을 저지르겠느냐 하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자체 모순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의 후계자다 될 부통령은 아무나 당선해도 오불관언이라고 하면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참으로 그랬다면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도 없고,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 대통령이 못 된다는 것을 역으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경찰의 총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청 명이 부상당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고 엄연한 진실이 사라지는가.
이승만 추종자들이 아무리 총탄발사를 몰랐다고 주장해도 이승만이 집무하는 경무대에서만 학생 수십 명이 죽었다. 콩 볶듯 난사하는 경비경찰과 같은 집에 있었던 이승만은 그 엄청난 총성을 불꽃놀이 정도로 인식했단 말인가. 이런 주장으로 이승만의 무죄와 무류(無謬)를 강변하면 할수록 국민은 멀리 떠난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고 거부한 4.19혁명단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스스로 동상과 기념관을 접고 역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나마 국민의 동정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당선이 확실한데 무슨 부정을 저지르겠느냐 하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자체 모순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의 후계자다 될 부통령은 아무나 당선해도 오불관언이라고 하면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참으로 그랬다면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도 없고,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 대통령이 못 된다는 것을 역으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경찰의 총에 수백 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청 명이 부상당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고 엄연한 진실이 사라지는가.
이승만 추종자들이 아무리 총탄발사를 몰랐다고 주장해도 이승만이 집무하는 경무대에서만 학생 수십 명이 죽었다. 콩 볶듯 난사하는 경비경찰과 같은 집에 있었던 이승만은 그 엄청난 총성을 불꽃놀이 정도로 인식했단 말인가. 이런 주장으로 이승만의 무죄와 무류(無謬)를 강변하면 할수록 국민은 멀리 떠난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고 거부한 4.19혁명단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스스로 동상과 기념관을 접고 역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나마 국민의 동정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전대열 객원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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