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자제품수리공의 하루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음마 뭐가 볼게 있다고 구경이래요, 하기사 나한테는 쟈들이 다 돈이긴 헝게..”

퇴근길 인파가 붐비는 대로변을 벗어나 외진 골목길의 모퉁이. 그곳의 한 평 남짓 보이는 전자수리 센터 안의 김덕수(가명)씨. 그가 박물관이나 가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접이식 문 달린 구형 티브이에 기자의 눈이 닿자 뭘 볼게 있냐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히 자랑 섞인 웃음이다.

그 웃음에 좀 더 안을 들어가 살피니 사람 하나 겨우 앉은 만한 공간을 빼고는 온통 전자부품 덩어리다. 사방 벽에도 온갖 부품들이 켜켜이 쌓은 먼지를 무겁게 인 채 걸려있다. 그러고도 밖에 대기하고 있는 차량 안에는 집수리 물품들이 실려있다. 전자제품수리 센터, 아니 종합 집수리설비? 벽에 걸린 상호명도 간단치가 않다.

아무튼 이곳 설비공인 김덕수씨, 올해 그의 나이 65세. 하지만 고객들이 혹 물어오면 58년 개띠라고 한단다. 특히 동네 단골들에게는 나이를 줄여 답하는 걸 잊지 않는단다. 그래야 일하기가 편하다고. 이것도 하나의 고객유치작전이라나.

“나이 많이 먹은 게 뭐 자랑은 아니잖아요. 한 살이라도 젊다고 해야 사람들도 안심하고 일거리를 맡기니까. 요새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물건이라 옛날 기술자들은 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걸 사람들이 귀신같이 잘 알아요.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한테 일거리 안 뺏길라면 나도 방법은 찾아봐야죠. 그리고 요즘은 에이에스가 잘돼서 옛날처럼 전자제품 들고 와 고쳐달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어요. 그러니 전기제품만 수리해서는 먹고살기도 힘들고”

그래서 덕수씨는 전자제품수리와 집수리설비를 같이 하고 있단다. 이 동네에서만 40년 넘게 일하다보니 고장 난 전자제품은 물론 어깨너머로 배운 집수리 기술까지 집을 한 채 짓고도 너끈히 남는다며 너스레까지 잊지 않는다.

“뭐든 다 하죠. 막힌 하수도며 변기도 뚫고, 고장 난 현관 열쇠도 고치고, 집 안의 빨래걸이도 설치하고, 장마철 누수 공사에 겨울철 터진 보일러까지 벽의 타일도 붙여요. 어디 그뿐인가요. 폭삭 주저앉은 소파도 새것처럼 갈아주는데 그러니 뭐든 불러만 줘봐요. 신속하게 다 처리할 테니까.”

이렇게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이제 이 동네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가 됐단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자신을 맥가이버라고 부르는데 듣기 나쁘지 않다고. 그렇지만 자신의 집 고장 수리만큼은 아내의 몫이라고 한다.

“자장면집 주방장이 자기 집에서 자장면 만드는 것 봤어요. 못 봤잖아요. 나도 마찬가지지로 내 집에서는 쉽니다. 집에 들어가면 손 하나 까닥 안 해요.  지금까지 눈이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안 쉬고 식구들 건사하느라 허리가 휘었는데 무슨 집에서까지 일을...”

그러니까 덕수씨가 이처럼 고장물품 수리공이 된 것은 13세살 홀로 어린나이에 충북옥천에서 올라와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기술 배우려고 서울로 올라왔죠. 그때는 다들 그랬으니까 남자들은 기술배우면 평생 배는 곯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사진=신현지 기자)

그래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방팔방 산밖에 보이지 않는 시골에서 먼 친척을 따라 도착한 곳이 서울역 뒤편의 쬐그만 자전차포집이었어요. 그 집에서 한 3년을 살았는데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손님 오면 자전거 빌려주고 바람 빠진 자전거 바퀴에 바람 넣어주는 일이 고작이었어요. 

그러니 기술은커녕 주인집 아들 연애편지 심부름에 눈치만 늘었죠. 그래도 그 나이에 그것이 미래가 없다는 것은 알았는지 무작정 그 집에서 나와 들어간 곳이 남대문 근처의 소리사였어요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전파상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곳에 들어가 라디오 수리부터 각종 전자제품 수리하는 것을 배웠죠. 물론 처음에는 그것도 큰 기술이라고 잘 안 가르쳐 줍디다. 주인아저씨 어깨너머로 몰래몰래 훔쳐 배웠죠. 그러다 된통 얻어터지고, 부품을 잘못 교환해서 오히려 물어주기도 하고 온갖 설움을 다 당했어요. 기술 가르쳐 준다고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그러니 요즘 애들 같으면 고용노동부에 신고한다고 난리였을 것인데 당시 나는 그런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또 그 당시는 다들 그런 줄 알았고요. 암튼 그렇게 한 5~6년을 버티고 보니 웬만한 가전제품은 다 고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좀 큰 을지로 쪽으로 옮겼지요.

그런데 웬걸, 같은 서울인데도 엄청난 차이가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부부싸움에 내동댕이친 라디오 고치고 고장 난 선풍기 날개나 뜯어고치고 했던 동네의 소리사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이거죠.

한 번도 보지 못한 신식제품들이 많아 손도 댈 수 없었고. 컴퓨터라는 것도 처음 봤으니까요. 그러다보니 거기서도 엄청 고생했죠. 얻어터지기도 많아 얻어터지고 그래도 한 번도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물론 지금은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튼 그렇게 저렇게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전자제품 기술을 익혀 이 동네에 전파상을 따로 차린 것이 결혼해서부터이니 약 40년이 넘었네요. 이 일 하면서 두 아들 가르쳐서 다 장가보내고, 네 식구 굶지 않고 먹고살고. 그래서 속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하는데...“

이렇게 덕수씨는 40년 지나온 길을 더듬다 말고 기자 앞에 한참이나 한숨이다. 그 이유인 즉, 아들 둘 다 아직도 변변한 직장 한번 구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장가가 부모에게 손 벌리는 가들도 불쌍하긴 한데 솔직히 나도 이젠 지치네요.

나처럼 살지 말라고 두 아들놈들 대학까지 보냈는데, 어디 대학만 보냈나. 어학연수인지 뭔지 보내달라고 해서 그것도 보냈지, 알량한 대학에 들어가면서도 삼수까지 하고 그런데도 저렇게 놀고 있으니. 그래도 큰놈은 웃음치료사인가 뭔가 한다고 깜냥에 바쁜 모습을 보이는데 작은놈은 노량진 고시학원에서만 벌써 몇 년 째인지 모르겠어요. 

이 동네 같이 공부한 놈들은 벌써 다들 공무원이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데. 내 자식놈은 공부는 뒷전이고 연애만 했던 건지. 암튼 둘 다 결혼은 했어도 아직은 앞가림을 못하니 아직은 이 일을 접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 솔직히 이 나이에 집에 들어가 앉아있고 싶지도 않고요. 아직은 일할 기운이 있는데 뒷방 늙은이가 되는 건 내 성격에 안 맞아요. 그리고 내 또래 이 동네 남자들 할 일없어 힘 빠트리고 다니는 모습 보면 내 직업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아침마다 갈 데 없어 툭 하면 여기나와 시간 죽이는 남자들, 한때는 학교 교장에 또 시청 공무원에 대단해 보이기만 했는데 지금은 아무 일자리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걸 보면 평생 일해도 나가라는 사람 없고 눈치 볼 것 없는 내 일이 천직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지만 덕수씨는 두 아들이 직장을 구하면 그날부로 가게 문을 닫고 늘어지게 늦잠을 한번 자볼 생각이라고 한다. 또 남들이 다가는 해외여행도 동부인해서 가보고,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어 드라이버를 쥘 힘이 없어질 때가 되면 그때나 고향에 내려가 푹 쉬지 않겠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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