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 칼럼니스트
전대열 칼럼니스트

[중앙뉴스=전대열] 판문점에서 만난 세 사람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정상들의 모임은 언제나 매우 근엄하다. 수없이 많은 매스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아야 되기에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쓴다.

대부분 웃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데 웃음이 갖는 평온성(平穩性)은 세계 어디에서도 통하는 보증수표이기 때문이다. DMZ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만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감히 말도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트럼프가 한국에 오면 미군이 지키고 있는 군사분계선 GP를 방문한다는 것은 과거의 예를 보더라도 공지의 사실이었지만 판문점으로 김정은을 불러낸다는 발상은 트럼프 아니고서는 아무도 흉내 내기 어렵다.

중재자를 자처하는 문재인으로서도 마음속의 희망이야 있었겠지만 직접 제안하기에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김정은조차 그 제안을 받고 깜짝 놀랐다고 실토한 것만 봐도 트럼프는 감각적으로 뛰어난 이벤트의 달인임을 알게 한다.

트럼프의 트윗정치는 널리 알려졌지만 정상들의 번개모임도 트윗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듣는 미국대통령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자유의 집을 나서 김정은을 군사분계선에서 기다릴 때까지의 표정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김정은은 하노이 결렬 후 푸틴과 시진핑까지 만나며 곤경을 벗어나려는 안간힘을 써오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야 할 입장이었는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트럼프의 판문점 초청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으면 함박웃음을 머금고 나왔겠는가.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려는 트럼프를 안내하는 것은 이미 문재인과의 체험이 있기에 거침이 없었고 오히려 북측 통일각 앞 보도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등 하노이 노딜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 엿보였다. 문재인은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에 동석하지 않고 사전에 “이번 모임은 북미가 주역”이라고 애써 자세를 낮췄지만 북미정상회담이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합류하여 오지랖 넓은 중재자의 역할을 다했다.

남북미 정상이 따로 또는 함께 자주 만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북핵이다. 중국이 처음으로 원폭실험에 성공했을 때부터 김일성은 모택동을 만나 핵에 대한 강열한 욕구를 보였고 김정일로 이어지면서 국제원자력기구를 탈퇴하며 핵 제조에 심혈을 기우려왔다. 3대세습의 김정은이 드디어 핵과 장거리미사일 실험에 성공할 때까지 세계 최빈국인 북한이 설마 핵을 성공시킬까 미국은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막상 북핵이 현실화하자 크게 당황한 미국은 6자회담으로 제동을 걸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빼고 당사자인 남북 그리고 미국이 머리를 맞댄 것이 싱가포르에서의 역사적인 북미회담이다. 제법 회담다운 마무리를 지은 것으로 평가받은 싱가포르회담은 6개월 후 하노이에서 2차 회담을 가질 때까지만 해도 톱다운 방식의 큰 틀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입으로만 ‘완전한 비핵화’를 외치는 김정은의 수법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경제제재로 숨이 막힐 지경인 북으로서는 우선적으로 제재완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세계의 여론을 등에 업은 미국으로서는 급할 게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국의 역할도 중재자로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트럼프는 재선에 성공해야 하는 입장에서 질질 끌기만 할 수는 없다. DMZ 만남은 남북미 모두에게 숨통을 터준 셈이다. 오늘도 실무자들은 어디에선가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는 트・김의 담판회담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도 재선을 코앞에 둔 처지에 한가하게 트윗이나 날리며 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북핵에 대한 매듭이 지어져 외교적성과를 과시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역시 제재를 풀지 않고서는 경제적 난관을 돌파할 방법이 없다. 구걸하다시피 쌀을 얻어오지만 그것으로 인민을 배부르게 하진 못한다. 북핵을 폐기하고 개혁 개방에 나선다면 평화통일의 신기원을 이룩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선 숨통은 터야할 게 아닌가.

한국은 최저임금과 소득주도성장정책의 미숙함으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으며 민노총의 횡포에 빚진 죄인처럼 뺏던 칼도 집어넣는 소심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회전문 인사가 거듭되면서 정권의 신선감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참에 북핵문제가 가냘프나마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은 참으로 운과 복이 겹쳤다. 판문점에서 세 정상은 모두 승자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손해 볼 것 없는 거래를 한 셈이다. 이제는 마무리만 잘해야 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남북미 정상들의 외교적 노력과 세계민의 간절한 염원이 메아리 처 북핵폐기와 제재해제 그리고 남북왕래의 자유화가 이뤄져 통일로 치닫기를 바랄뿐이다. 판문점에서의 역사적인 만남을 한낱 이벤트나 쇼로 끝낸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이 될 것이다.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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