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영원한 기다림의 십자가이며 축복이자 삶의 꿈

 

강웅부작가의 '오방색'으로 빛나는 "기하학적 형태의 메시지"
강웅부작가의 '오방색'으로 빛나는 "기하학적 형태의 메시지"

[중앙뉴스=윤장섭 기자]강웅부작가는 1990년 한국을 떠나 뉴욕에 체류하며 오랫동안 작품 발표를 해온 뉴욕커이다. 그런 그가 서울에서 오랜만의 귀국전을 위한 인터뷰에서 뉴욕에서의 예술가적 삶이 어떠했는지, 그에게 예술이란 어떠한 의미인지를 아주 극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이렇게 고백 한다 "내 그림의 주제는 의식의 개념으로 내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향과 생각의 전환으로 일생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이다.

다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발언처럼 강웅부의 그림은 화폭 자체가 내면에서는 성스럽고 숭고한 마치 종교적인 심정으로 한곳을 향한 방향으로 이끄는 “직선의 방향성”을 설정 해두고 있다.

대부분 이러한 작가의 경우, 그러한 메시지를 위해 의미와 내용에서 형상과 스토리로 표현 하는데 강웅부의 경우는 매우 색 다른 표현방식을 선택했다.

적어도 미래의 꿈과 희망을 향해 도전하고 열정을 호소하는 목적의 경우 화면에  테마로서 구상적인 형태가 보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일 것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마치 간절한 소망의 자세로 이성적인 진정성의 표현에서 그는 구상적인 세계보다 옵티컬한 아트(Optical Art)로 방향을 두고 출발했다.

강웅부작가의 '오방색'으로 빛나는 "기하학적 형태의 메시지"
강웅부작가의 '오방색'으로 빛나는 "기하학적 형태의 메시지"

▲ 예술은 영원한 기다림의 십자가이며 축복이자 삶의 꿈

기본적으로 그는 화면에 기하학적인 요소와 형태를 바탕에 두면서 시작한다. 기하학적으로 연결된 구성적인 색채들을 미묘한 색채 스펙트럼으로 전이시키는가 하면, 동시에 강력한 리듬감과 운동감으로 눈에 착시를 일으키는 지점에서 그의 회화적 시작은 확인 된다.

이런 시각적 구성의 이미지로 볼 때 그의 화면은 분명 회화적인 인상보다는 그래픽적인 시각적 특성과 현상을 압도적으로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소위 시네티즘이라 불릴만한 옵티컬 아트가 빛이나 ·색채 ·그리고 다양한 형태들과 교차하며 시각적인 미술로 향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시각적인 인상이나 감성에 호소하기 보다는 마치 몬드리앙에 차거운 추상의 미술처럼 지적이고 이성적인 차가운 느낌으로 감성의 착시와 색채의 변화에 주목하게 한다.

그의 형태들이 주는 다양하고 풍부한 구성, 기하학적 형태의 선과 움직임들이 강렬하게 빛의 연속성에서 예술적 가치를 충분히 빛나게 한다.

어쩌면 그의 회화는 옵티컵의 거장 빅토르 바자렐리처럼 현란하지만 시각적 즐거움과 메시지를 다채롭게 전해주는 측면에서 그만의 독특하고 풍부한 매력이 돋보인다.

마치 적절하게 원근법과 대칭적인 기법으로 시각적 빛과 컬러가 주는 희열의 최대치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리하여 다소 딱딱하고 디자인적인 옵아트는 순수한 시각적 표현으로 다이내믹한 빛과 색의 흐름만으로도 평면회화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작가의 집중적인 열정은 196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반응하는 눈(responsiveeye)>이라는 주제의 기획전에서 새로운 추상예술로 나아간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미 바자렐리가 "회화와 조각은 시대착오적인 의미가 되었다며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예술가의 부호(signature)를 찾게 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강웅부의 작품들은 읽혀진다.

색채와 형태, 빛을 아우르면서 순수한 시각상의 효과를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것에서 그러한 유사성은 더욱 닮아있다.

그의 작품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사선과 평행선은 물론 바둑판무늬, 동심원 등의 때로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이 교차하는 명도와 보색을 병렬시키는 화면 구성은 분명 색다르다.

물론 이러한 색채의 긴장상태를 다각적으로 일으키는 회화의 힘은 강웅부만이 가진 작가의 영역임은 명백하다.

그의 메시지가 우리가 추구하는 미술에서의 이상과 설령 다르다 하더라도 작가는 시각적인 일류전을 부여함으로써 색과 형태의 극적인 대비와 조화, 때로 분리로 변환시켜 호화의 또 다른 시각적 의의와 기능을 구축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바쳐주는 것이 오방색이란 사실이다.

강웅부작가의 '오방색'으로 빛나는 "기하학적 형태의 메시지"
강웅부작가의 '오방색'으로 빛나는 "기하학적 형태의 메시지"

강웅부의 작품에서 우리가 지나쳐서 안 될 이 오방색 사용은 옛사람들이 우주 변화의 원리로 생각했던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탄생한 다섯 색깔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알류미늄 판에 기하학적 도형과 기호로 시네티즘을 방불케하는 시각적 요소들이 오방색과 만나면서 더욱 컬러풀한 우리다운 화면을 장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오방색을 통한 강한 열정과 미래에 대한 비젼을 현대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가 지배적으로 사용하는 오방색이 단순히 다섯 가지 색깔(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로 오방색의 깊은 뜻을 넘어 동서남북과 중앙, 이렇게 다섯 방향을 나타내며 동시에 나무, 불, 흙, 쇠, 물, 이렇게 세상을 이루는 다섯 요소로 이 오방색을 고집하는 것은 곧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일과 한국인의 정신과 삶을 담고 있는 문화라는 것에 방점을 찍어둘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오방색과 더불어 다채로운 빛깔이 함께 어우러져 세상을 아름답게 채운다는 깨달음을 전해 준다는 신념을 가진 드문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강웅부의 회화는 마치 종교적인 메시지처럼 '어느 날 불현 듯 그 비젼, 그 축복'으로 요약 되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

그는 알류미늄판에 이국에 살면서 동시대적 미의식으로 한줄기의 오방색 빛줄기로 조국을 향한 그리움에 관한 강렬한 희망의 메시지를 뜨겁게 날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 궁극적으로 이처럼 강웅부의 작업은 “예술은 영원한 기다림의 십자가이며 축복이자 삶의 꿈”이다

이제 강웅부 작가는 시네티즘(cenetisme)의 계승자로서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하는 위치를 변화시킴에 따라 외관이 변화하게끔 만들어진 추상회화의 반열에 서있다.

어쩌면 때로는 라파엘 소토처럼 연속적 순서에 맞추어 이야기의 빛들에 조명을 밝히거나 움직임의 환영을 이야기하는 움직이는 그림처럼 모빌 회화를 탄생 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메탈 이미지로 삶의 축제에 모든 색채와 형태가 어울려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처럼 찬란한 빛의 회화로서 재탄생하는 순간을 그는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강웅부 회화의 진정한 가치이기도 할 것이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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