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중 구의원이 말하는 코딱지라도 해야 하는 이유
민주당의 후퇴
문제적 석패율제
대결 정치와 저주 정치
승자독식
노무현의 꿈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23일 밤 국회 본회의장에서 선거법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가 시작된 만큼 이제 끝까지 통과시키는 일만 남았다. 물론 거대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이해관계로 인해 선거제도 개혁은 아주 미미하게만 나아갔다. 모든 관심이 지금 한창 진행 중인 필리버스터로 향한 마당에 선거법 개정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정의당 소속 이기중 관악구의원은 23일 오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나마 예전에 비해서는 민심이 의석에 반영되는 비율이 조금 늘어났다. 현행 제도보다는. 그런 상황이다보니 아예 이걸 걷어차는 것 보다는 정말 맛만 보여주는 수준이지만 예전보다 반의 반보라도 나갔다는 것만 해도 어쩔 수 없이 현실 정치에서 수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물론 다음 총선에서는 구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 개혁 요구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적어도 4년 전의 경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안(100%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나왔었지만 지역구 하나 늘리고 비례 하나 줄이는 것으로 (선거법 개정이) 끝났다”고 덧붙였다.

이기중 관악구의원은 코딱지만큼 갔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사진=이기중 구의원 페이스북)

이 구의원은 “4년 전 보다는 그래도 이번에는 적어도 후퇴하지 않고 코딱지 만큼 앞으로 나갔다”면서 “매번 (이렇게 선거제도 개혁의 원형에 한참 못 미치는 안을 수용해야만 하는) 그런 자괴감이 들긴 하는데”라고 표현했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배출한 대통령들의 뜻을 이어가는 차원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천명해왔다.

하지만 이 구의원은 “선거제도 개혁의 주요 내용이란 게 국민 지지율과 정당 의석수가 일치하는 그런 비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처음에는 다들 그런 방향에 동의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가 결국 이제 다음 총선이 다가올 때쯤 되니까 민주당이 자기들의 비례 의석을 챙겨야 된다. 비례 의석 몇몇 정도는 공천권을 행사해야 된다는 이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후퇴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23일 최종 선거법 수정안 발표)의 귀결은 비례 의석은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에서 석패율도 없어지고 결국에는 정말 연동형의 맛만 약간 보여주는 이런 개혁에 그쳐버렸다”고 밝혔다.

결국 이 구의원은 “현실적인 힘의 논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그런 거다.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이 요새 계속해서 누가 더 못 하냐의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구는 일단 자신있고 정당 지지율에는 그만큼 못 받을 것 같고 그런 상황인 것”이라고 관측했다.

아울러 “특히나 최근 석패율제에 대해서 처음에는 다 합의했던 상황인데 지난 주말부터 석패율을 절대 못 받겠다고 나왔다. 그런 부분은 정의당 후보들이 지역구로 출마를 많이 했을 때 본인들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부분 때문에 절대 못 받겠다고 했다. 특히 내가 있는 서울시 관악을의 경우 그런 게 많이 느껴진다”면서 운을 뗐다. 

이 구의원은 “여기 민주당 후보 중의 하나가 정태호 전 청와대 일자리수석인데 관악을에 정의당 쪽 후보(신장식 변호사)는 과거에 10% 넘게 득표했던 후보이고 그렇다 보니까 이분이 지역구 선거로 나가서 석패율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이만큼 득표하면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 있다고 하면 지역구 유권자들은 찍어줄 이유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됐을 때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비슷한 지역이 꽤 있을텐데 어쨌든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들리더라. 석패율제를 못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이 청와대 발이다. 그리고 정말 심하게 말하면 여기서 정태호가 얼마나 영향력을 미쳤는지에 대해 다들 궁금해하는 게 있다”고 덧붙였다.

정말 길게 보면 故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꺼냈던 20년 전부터이고 짧게 보면 작년 6.13 지방선거 직후부터 선거제도 개혁 정국이 시작됐다. 이렇게 진통의 진통을 겪어서라도 선거법을 바꾸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현행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1등만 당선되고 나머지 후보는 전부 낙선자가 된다. 1표만 더 많이 받아도 모든 것을 다 갖게 되는 승자독식 구조다. 유권자의 표심은 1등에게 닿은 것 외에 전부 죽은 표가 되어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대통령제 자체가 권력을 대통령에게 몰아주고 입법부에게 견제권을 주는 체제로서 대립과 반목을 상시화시킨다. 그러다보니 가장 뜨거운 여야 쟁점 이슈가 불거지면 온갖 무쟁점 민생 사안들은 뒤로 밀리고 또 밀릴 수밖에 없다. 

또한 거대 양당의 극단적인 저주 정치를 부추긴다. 한국 정치사의 뿌리로 보더라도 민주당과 한국당은 군사독재 정권을 지나 1987년 체제 이후에도 각각 3번·4번씩 집권을 해오면서 상대를 주저앉히고 공격하는 데 몰두했다. 상대가 못 해야 내가 생존하는 정치 구조이기 때문에 야당은 정부여당의 발목을 잡고 무조건 반대할 수밖에 없다. 생산적인 토론과 합의의 정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 문재인 정부와 한국당의 관계만 봐도 한국 정치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먼저 바꿔서 조금이라도 타협하고 합의할 수 있는 정치 문화를 조성해야 하고 이것이 전제돼야 대통령 권력을 분산하는 분권형 개헌으로 갈 수 있다.

현행 선거제도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정원이 각각 253석 대 47석이다. 지역구는 승자독식 방식이고 비례대표는 정당 득표율에 따라 오직 47석 안에서만 별도로 배분된다. 이게 병립형이다. 양당은 지역구에서 상호 당선을 막기 위해 유권자들의 결집 투표를 유도한다. 예컨대 실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아도 한국당 당선을 막기 위해 무조건 민주당에 표를 주도록 강요되는 것이다. 그렇게 지역구에서 양당이 각각 100석 이상씩 차지하고 나머지 47석의 비례대표에서도 정당 득표율에 따라 추가적으로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 유권자가 투표한 표심 그대로 의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선거제도의 선진적인 모델은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전면 비례대표제다. 그에 못 미치지만 대안으로 떠오른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이런 거다. 300석 기준 A정당이 지역구에서 5명을 당선시키고 정당 득표율 10%를 받으면 30석 확보를 보장하기 위해 비례대표 의석 25석을 할당받는다.

하지만 민주당은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한국당과 같이 거대 정당으로서 승자독식 구조의 기득권을 덜 양보하기 위해 연동형을 원형에서 점점 후퇴시켜왔다.

이를테면 ①2015년 박근혜 정부 하의 선관위가 지역구와 비례대표 200대 100 모델의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 ②2019년 4월말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225대 75 모델의 50%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원안 ③4+1에서의 250대 50 모델 ④250대 50에서 비례대표 30석에 한정해서만 캡을 씌워 연동형 적용 등 그동안 끝없이 거대 정당 민주당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①→②→③→④으로 후퇴돼왔다. 

3+1(바른미래당 당권파·대안신당·정의당·민주평화당) 중 대안신당을 뺀 3당이 13일 ④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가 18일에 꾸역꾸역 ④까지 수용한 뒤 석패율제 도입을 내걸었는데 민주당은 그마저 의원총회에서 걷어차버렸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⑤패스트트랙 원안에 들어간 석패율제 삭제 ⑥비례대표 의석 현행대로 47석 유지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기득권을 수호했다. 

①→⑥까지 왔기 때문에 정치개혁공동행동 등 진보적 시민사회에서는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다. 하지만 그게 곧 거대 정당이 지배하는 국회에서의 현실이기 때문에 누더기가 됐더라도 스타트 테이프를 끊는 차원에서 수용하는 울며 겨자먹기의 심정을 공유하고 있다.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는 24일 아침 국회 본청 출입구 앞 마련된 농성장에서 열린 의총에 참석해 “물론 선거법 개정안은 정치 개혁을 온전히 실현하기에 만족스럽지 못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혁은 시작되고 반드시 전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대승적으로 수용했다”고 밝혔다.

다시 정리하면 현재 필리버스터가 이뤄지고 있는 선거법(⑥)의 골자는 △50%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253대 47 △비례대표 의석 30석에만 연동형 적용(캡) △석패율제 삭제 △선거권 연령 만 18세 하향 등이다. 

그러니까 이제 새로운 선거법이 통과되면 <지역구 당선자 수 →비례대표 17석 중 정당 득표율에 따른 병립형 의석 배분 → 비례대표 30석에 한해 정당 득표율에 따른 연동형 의석 배분>의 절차를 통해 결과가 나오게 된다. 만약 양당이 정당 득표율을 뛰어넘는 지역구 당선자 수를 배출했다면 적어도 30석에 한해서는 한 석도 얻지 못 하지만 병립형으로 비례대표를 확보할 수 있다. 3+1과 새로운보수당 등 소수 정당들은 정당 득표율의 50% 의석수를 확보받은 뒤 지역구 당선자 수를 제하고 나머지 30석에 한해서 차례로 배분받게 된다.

20대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 122석=지역구 105석+정당 득표율 33.5%(17석) △민주당 123석=110석+25.54%(13석) △국민의당 38석=25석+26.74(13석) △정의당 6석=지역구 2석+7.23(4석) 등인데 새로운 선거법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민주당 115석(-8) △한국당 112석(-10) △국민의당 54석(+16) △정의당 10석(+4)으로 나온다.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어필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꺼낸 김종민 의원. (사진=연합뉴스)

24일 새벽 본회의장에서 두 번째로 필리버스터에 나선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故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 정치를 타파하는 선거제도를 만든다면 정권을 내어줘도 좋다고 말했다”면서 “이같은 결단은 링컨이 남과 북이 통합할 수 있다면 남쪽 전쟁장관을 임명하겠다는 결단이나 루즈벨트가 재벌체제 개혁과 경제민주화를 할 수만 있다면 경제 권한을 공화당에 다 주겠다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선거제 개혁 논의는 20여년 넘게 주어진 과제였다”며 “노 대통령이 정권을 내주더라도 대한민국을 한 번 개혁해보자는 취지로 대연정을 제안한 게 2006년이 아닌 2003년 4월이다. 취임 한 달만”이라며 “정권 잡은 지 1년도 안 됐는데 내주겠다고 말했다. 다양한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가 국회 반영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정치 인생을 선거제 개혁에 던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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