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너를 사랑하는 힘』 펴낸 안효희 시인
중독
안효희
검은 커튼을 치고
TV홈쇼핑, 인터넷 쇼핑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녀의 클릭, 클릭
45° 구부러진 손가락이
유일한 외부와의 소통
초인종을 세 번 누르는 남자는
택배!
그리고 택배!
무감각으로 먹어치우는
옷과 이불, 의자와 냉장고, 유리 그릇과 냄비……
외출은 절대 사절
육중한 현관문은 잠시 열렸다 닫힐 뿐
상자들로 가득한
그녀의 공간,
어제와 오늘이 찬 치의 오차도 없다
다만 흐르지 않는 시간들
독신주의가 아니에요!
신비주의 전략이 아니에요!
저절로 이루어진 초현실주의
지극히 충실한 삶이라 주장하는
출입 금지 구역
보호 통제 구역
- 안효희 시집 『너를 사랑하는 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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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를 읽다보면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시도 있다. 누군가도 나와 같은 약점을 공유하고 사는구나 하는 동질성에 안도하는 심리인지도 모른다. 중독, ‘중독’이라는 이 단어는 왠지 부정적인 느낌이 먼저 든다. 밝고 명쾌한 그런 습관들은 중독이라고 하진 않는다. 나는 생활 밀착형 중독자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조금 더 진해지면 독성이 강한 중독자 반열에 들게 될 것임을 문득 깨닫게 되어 다행이다. 화자 역시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에서 비롯, 이러한 시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손쉽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무엇이든 구입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는 것은 분명 문명의 혜택이다. 그 혜택은 양날의 칼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퇴근해 돌아와 습관처럼 인터넷 시장 구경 좀 하다가 반찬거리를 주문하고 나니 또 뭔가 허전해서 패션몰을 훑어보다 입맛을 다시며 또 TV 채널을 돌려본다. 마법에 걸린 듯 신발을 주문을 했다. 신발장을 들여다보니 3년째 쉬고 있는 빨간 구두가 눈을 흘긴다. 주문을 취소했다. 암튼 나도 경증이든 중증이든 중독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나에게 꼬집듯 일갈하는 이런 시, 참 참하다.
딩동! 오늘 하루가 도착했음, 택배 알리미 도착음이 명랑하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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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희 시인 /
부산 출생
1999 《시와사상》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제5회 《시와사상》 문학상 수상
시집 /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 서른여섯 가지 생각』 『너를 사랑하는 힘』
부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