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갤러리 초대석 그림에 미치다③]김종근의 위대한 화가의 명언과 명화들...빈센트 반 고흐
[중앙 갤러리 초대석 그림에 미치다③]김종근의 위대한 화가의 명언과 명화들...빈센트 반 고흐
  • 윤장섭
  • 승인 2020.02.2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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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 그 열정과 광기의 색채(1)-노랑 1853-1890
고흐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아버지...고흐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동생 테오에게 “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

고흐는 미술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화가로 불린다.(자료=김종근 교수)
고흐는 미술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화가로 불린다.(자료=김종근 교수)

고흐는 미술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화가로 불린다. 그의 생애가 너무나도 참담하고 37살이라는 짧은 생애의 자살이 지독하게 안타깝기 때문이다.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 쥰데르트 시골, 그의 이름은 빈센트 윌렘 반 고흐.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 쥰데르트 시골. 반 고흐의 고향(자료=김종근 교수)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 쥰데르트 시골. 반 고흐의 고향(자료=김종근 교수)

그러나 그 이름은 1년 전 같은 날 먼저 죽은 고흐라는 형의 이름을 그대로 달고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치 살바드로 달리처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훌륭한 목사가 되길 희망 했지만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목회를 포기하고 그는 청년으로 교회와 화상 사이에서 고뇌했다.

16살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숙부가 설립한 구필화랑에서 점원으로 처음 취직, 브뤼셀 지점으로 21살엔 파리와 런던에서 복제화를 파는 화상으로 1876년 초까지 7년 동안 일을 했다.

한 때 스무살 런던에서는 하숙집 로이어 부인의 딸 우르슬라를 사랑했지만 거절 당하기도 했고 23살에는 네덜란드로 돌아와 성직자가 되기 위해 예비 신학생이 되지만 절망스럽게도 포기했다, 재능이 없었다.

결국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벨기에 남쪽 탄광촌인 보리나주로 왔지만 자신을 탄광의 노동자와 동일시하여 전도사도 못되고 적응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고

이런 사건으로 인해 고흐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후에 그는 ”사랑에 빠졌어야 했는데 종교와 사회 문제에 빠졌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27살 그는 혼자 독학하며 광부들을 그리고 밀레 작품을 모사하며 서서히 화가가 되어 갔다.

27살의 반 고흐,  그는 혼자 독학하며 광부들을 그리고 밀레 작품을 모사하며 서서히 화가가 되어 갔다.(자료=김종근 교수)
27살의 반 고흐, 그는 혼자 독학하며 광부들을 그리고 밀레 작품을 모사하며 서서히 화가가 되어 갔다.(자료=김종근 교수)

1881년 28살, 그는 그의 사촌이자 과부였던 36살의 케이보스 스트릭커를 연모하여 집요하게 사랑 고백을 하였지만 실패했다. 그 후휴증은 너무나 심각했다. 이 스캔들로 결국 부모와 친척을 수치스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그를 내쫓았고 경제적 지원을 하루아침에 다 끊었다.

갈 곳이 없던 고흐는 이듬해 사촌 안톤 모베에게 그림을 배우러 헤이그로 갔는데, 여기서 또 고흐는 어린 딸을 둔채 임신한 이혼녀이자 창녀인 시엔 호르닉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고흐는 그녀와 20개월 동안 동거하며 그녀는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언제나 그의 사랑은 실패했고 좌절과 가난 속에서도 악착같이 그림을 붙들었다.

고흐는 좌절과 가난 속에서도 악착같이 그림을 붙들었다.(자료=김종근 교수)
고흐는 좌절과 가난 속에서도 악착같이 그림을 붙들었다.(자료=김종근 교수)

서른 한살 그는 아버지가 있는 누에넨으로 돌아가 아틀리에를 얻어 <직조공> <농부들>을 제작했고 브라반트의 풍경을 그렸지만 동생 테오는 이런 그림은 아무래도 안팔린다고 고흐 그림 팔기를 거부하며 ”우리의 총구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며 고흐는 큰 슬픔과 비탄에 빠졌다.

그래서 그가 초기에 그린 그림은 어둡고 우울했지만, 32-3살 그의 화폭은 서서히 화사한 색상으로 눈부시게 변모하였지만 기술은 여전히 부족했다.

몽마르트 풍경과 꽃을 그리고 초상화를 주문 받았지만 한점도 팔리지도 주문도 없었다. 투루즈 로트렉처럼 그리고 쇠라나 시냐크처럼 점묘법 화풍을 습득 했지만 고흐의 사정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파리로 오면서 동생 테오에 도움을 받으며 화가의 길로 들어서며 폴 고갱과 교류하고 인상파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태양을 목말라 했다.

당시 유럽에 포장지로 흘러들어왔던 일본의 우끼요에 그림은 쟈포니즘이란 말로 유럽을 흔들었다. 클림트, 모네, 고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일본화의 영향으로 시골의 평화와 고요함을 그리워하며 ”일본 아니면 일본과 견줄만한 남쪽 “을 한없이 갈망했다.

1888년 2월 태양빛을 찾아 그는 드디어 아를르로 갔고 거기서 노란집을 빌렸다. 그러나 원래 그는 마르세이유로 가다 잠깐 머무려무려 했지만 거기서 눌러 앉았고 , 그는 점점 남불의 노랑색을 사랑하게 되었다. 색채는 점점 밝아지고, 양식도 완전히 변했다.

고흐는 점점 남불의 노랑색을 사랑하게 되었다. 색채는 점점 밝아지고, 양식도 완전히 변했다.고흐의 작품들(자료=김종근 교수)
고흐는 점점 남불의 노랑색을 사랑하게 되었다. 색채는 점점 밝아지고, 양식도 완전히 변했다.고흐의 작품들(자료=김종근 교수)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꿈이었고 희망이었던 고흐는 10월말 고갱이 아를르로 왔고 그는 더욱 일본풍의 그림을 그려댔다.

거기서 그는 일본의 유명한 호쿠사이의 그림을 빌려 그 그림에 영혼을 자신의 그림 속에 불어 넣었다.

그의 대표적인 노랑색은 이미 1887년 생애 처음으로 해바라기에서 강렬하게 드러났지만 고흐는 따뜻함, 우정 ,태양빛을 나타내는 해바라기의 노랑색에 이끌렸던 것이다.

“나는 새장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오 신이시여 ,다른 새들처럼 나에게도 새가 될 자유를 주십시오."
  

김종근의 위대한 화가의 명언과 명화들, (반 고흐가 태어난 집에서 김종근 교수)
김종근의 위대한 화가의 명언과 명화들, (반 고흐가 태어난 집에서 김종근 교수)

김종근의 위대한 화가의 명언과 명화들...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는 다음호(2)에서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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