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여정을 꽃 피우다

김광운 문학촌·검정서원 들풀문학발행인
김광운 문학촌·검정서원 들풀문학발행인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삶의 역풍에도 들풀처럼 꿋꿋하게 일어나 사회 곳곳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55의 진한 삶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화제다. 전국검정고시 출신의 문학인들로 결성된 문학촌의 동인시집 ‘들풀 꽃이피다’가 바로 화제의 책이다.

특히 이 책은 발행인이며 문학촌을 이끌고 있는 김광운 촌장이 한때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더 크로스의 메인보컬 김혁건의 부친이라는 사실에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크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교통사고, 그리고 죽음보다 더한 절망, 그 절망 끝에서 다시 부여잡은 실낱같은 삶의 희망, 그 희망으로 사지마비의 자식을 세상 속으로 일으켜 세운 아버지. 이 같은 부성애를 왜 가시고기에 비유하는 것일까. 아니, 가시고기가 피운 들꽃은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기에 역풍 속에도 그리 야무지게 핀 것일까.

김광운 촌장을 만나러 나서는 길은 남녘의 산수화 소식으로 도심의 햇살은 유난히 따뜻했다. 성북구의 OO스튜디오, 김광운 촌장의 사진작업실과 그의 아들 김혁건 가수의 녹음실이 있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꼭 닮아 있었다.

55인의 문우들과 함께 엮어낸 ‘들풀 꽃이피다’

그런 김 촌장의 첫인상, 선입견이었을까. 다소 의외였다. 아주 후덕한 인상이었다. 넉넉한 풍채와 구김 없는 환한 웃음, 조금도 굴곡진 삶의 흔적을 찾아볼 수 얼굴에선 문학촌을 이끄는 촌장의 면모만이 두드러졌다. 역시나 앉자마자 김 촌장은 55인의 문우들과 함께 엮어낸 ‘들풀 꽃이피다’를 먼저 앞세웠다. 그러면서 “우리의 자존심이다”라고 말했다

“검정고시인들의 자존심이다. 그간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하게 살아온 우리에게 문학촌은  자존심이고 자부심이다. 또 그런 취지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다들 실력이 출중해 책을 묶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전국검정고시 동문회 30주년을 맞는 지난해는 이를 기념하는 동인지 '들풀문학'을 창간했는데 그간 숨어있던 문장력이 놀라웠다. 또 표지까지 아주 근사했다. 빅뱅 속에 우주탄생을 표지에 담았는데 이는 무지 속에 지식을 습득하는 즉, 우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올해 2번째 동인지 ‘들풀 꽃이피다’ 역시 표지에 우리의 모습을 함축했다. 척박한 땅에서도 강인하게 자란 들풀이 이제 꽃이 피었다는 의미다. 김세정 작가가 그렸다. 동인지는 2년에 1번씩 낼 계획이었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 연거푸 냈다.

그만큼 우리 문학촌의 열기가 뜨겁다. 그 덕분에 이번에는 문학상 시상식도 예정되어 있다. 들풀문학상에 황금선, 신이숙, 조병엽 문우와 중앙뉴스상에 이범문 문우가 선정되어 있다." 

김광운 문학촌장과 그의 스튜디오.
김광운 문학촌장과 그의 스튜디오 모습 (사진=신현지 기자)

16세에 가난에 떠밀려 서울로 상경

이렇게 문학지에 깊은 애정을 드러낸 김 촌장, 전남신안 출생으로 5남2녀 중 장남인 그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쏟아주신 사랑은 대단했단다. 또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초등학교 교사를 꿈꾸었다고. 그 때문인지 김 촌장이 눈빛이 얼핏 바다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16세에 가난에 떠밀려 나온 고향 바다를 잊은 지 오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수에 찬 눈빛은 어쩌지 못했다.

“천막으로 지어진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다 16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월사금이 밀릴 때마다 종아리를 맞아야 했는데 그것이 너무 싫었다. 10킬로를 뛰어 집으로 가본들 나올 돈이 없는 건 빤했다. 당시 아버지는 면에 다니셨는데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문학을 참으로 좋아하셨다. 글에도 소질이 있으셨고 필체도 좋으셨다.”

그러면서 김 촌장은 초등학교 6년을 수석의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는 것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공부덕분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목포까지 나가 사다주신 삼국지를 완독했고 사진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암실에서였다고.

“아마 그 당시 케논 카메라를 가져본 사람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아니, 유일하게 우리 종조할아버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종조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나오시면서 가져오신 카메라로 사진 기술을 배웠다. 아버지가 암실을 만들어주셨고 나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사진 찍는 기술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들풀문학 동인시집'들풀 꽃이피다'

그 덕분에 김 촌장은 16살에 서울로 상경하면서 곧바로 사진관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단다. 그리고 사진과 시작한 인연이 어언 54년 째, 한때는 이름을 떨쳤던 허바허바 사진관을 거쳐 명작스튜디오를 설립, 우리나라에서 웨딩산업 분야를 최초로 선도하고 또 이를 발전시켜 일자리를 창출한 공로로 신지식인 대통령 표창상과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2번이나 수상하기까지 그는 돈도 많이 벌었단다. 

사진인생 54년... 신지식인 대통령 표창상과 문화관광부 장관상 2회 수상

“75년이었을 것이다. 사진관 영업시작 당시 우리나라에 최초 흑백주민등록 사진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진관이 엄청 흥행이었다. 10년 만에 300만원을 벌었다. 그 당시로는 정말 큰돈이었다. 부동산에 눈을 좀 떴으면 좋았을 것을, 당시 난 그런 걸 전혀 몰랐다. 은행에 저축하는 것이 다였다. 시골에 논도 좀 사드리고 그래도 집 3채를 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늘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갈증을  앓았단다. 그 갈증에 결국 나이 30세에 검정고시에 도전했고 2년 만에 대학입시를 치를 자격을 얻어 서울예술대학과 상명대학원에서 사진학을 전공했다. 또 한국방송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고대 컴퓨터과학기술대학원수료까지 했다. 그리고 2006대진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로 출강하게 되면서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는 것에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단다.

“그날이 내가 살면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날이었다. 그간 난 벙어리처럼 살이왔던 것이다. 동네유지 모임에서도 난 자신이 없어 입을 다물고만 있어야 했다. 아마도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졸업에 또 대학출강까지 하게 됐으니...”  

아들의 불의의 교통사고

하지만 우리 속담에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2012년 아들의 불의의 교통사고에 그는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그리고 아들을 다시 일어세우기까지 삶과의 치열한 전투를 펼쳐야만 했단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장례를 준비하라는 담당의 말에 난 그에게 미친 듯 매달렸다. 제발 살려달라고, 살게만 해달라고. 그리고 11시간에 걸치는 숨 막히는 수술에  병원 옥상에 올라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매달렸다. 우리 현건이를 살려달라고, 제발 아들을 살게 해달라고. 그러다 문득 하늘을 봤다. 새벽하늘에 금성이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난 나도 모르게 터지는 안도의 숨에 두 무릎이 꺾였다. ”아, 우리 현건이가 살아났구나“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난 그런 믿음이 생겼다”

노래가 전부였던 아들, 그것도 폭발적인 고음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거머쥐었던 아들, 그런데 교통사고로 그 모든 것을 잃게 되다니.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단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니, 아들은 다시 일어서야만 했기에 그는 24시간 혼신을 다해 아들과 한 몸이 되었단다.

사지마비의 중증 장애를 입은 아들의 손과 발이 되었고 폐활량이 일반인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아들의 제기를 위해 복식호흡으로 노래할 수 있도록 기계를 만들어내게 했단다. 그리고 결국 아들을 무대에 세우고야 말았고. 그리고 이 모든 힘이 검정고시정신에서 나왔다며 마치 아무 일도 겪어내지 않았던 사람처럼 싱긋 웃었다.

검정고시인의 정신으로 아들을 일으켜

그런 그의 웃음에서 들풀의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척박한 땅에서도 굴하지 않고 환하게 피어난 들꽃. 이런 그에게 잔인하게도 소망을 물으니. 아들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라고 렐슨 만델라의 명언을 읊조렸다. 평소에 좋아하는 글귀라고 했다. 끝으로 계획을 물으니 아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사진을 찍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그리고 다시 활짝 피는 꽃이길...

아울러 55인의 고난을 딛고 일어선 열정과 꿈, 그리고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들풀 꽃이피다’가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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