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국가를 위해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희생한 보훈 대상자를 가능한 한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하기 위해서 정부 부처의 하나로 법률에 의해서 규정하고 있는 기관이다. 생존자와 부상자만이 아니라 사망자까지도 모두 관장하고 있어 그 업무범위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으로 인한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광복 후에는 6.25동란으로 인하여 엄청난 동족상잔의 참상을 겪었다. 그 때마다 우리 국민은 불같이 일어나 외부의 적에 대한 강인한 저항을 계속한바 있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일제 헌병과 경찰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한 우리 동포는 너무나 많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부당한 재판을 받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고문에 의해서 끔찍하게 죽어간 인사가 얼마나 많은지 이루 다 헤아리기도 어렵다. 교도소에서 10년, 20년씩 징역을 살다가 광복 후에 석방된 사람도 많다. 남부여대(男負女戴)로 만주 땅에 이주했던 조선동포들은 옥수수 밭을 일구면서 피 땀 어린 고통을 감내한 끝에 광복을 맞이한 사실이 있다.

동포들은 고생을 하면서도 한푼 두푼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댔고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활동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서 정부는 공로에 따른 훈장을 수여하고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급한다. 6.25때는 너무나 비참한 동족상잔에 의해서 수백만의 희생자가 생겼다. 3년 동안 계속된 전쟁과 휴전 후에도 계속되는 무장간첩의 출현으로 이 나라는 영일(寧日)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간 억울한 영령들과 유가족이 남았으며 몸을 다친 수많은 생령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또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우리의 국군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이역만리에서 생명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전투부대의 이름은 청사에 빛나며 비들기부대 등은 의료부대의 역할로 환호를 받았다. 이들에 대해서는 전쟁규범에 따른 무공훈장이 수여되어 그 명예를 드높였다. 사망자는 호국영령으로 호칭되어 어떤 행사장에서든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올려 명복을 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국을 위해서 몸을 던졌던 인사들에 대해서 유가족을 위로하고 생존자에게는 보상금을 주는 것은 국가보훈처가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우리 국민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 4.19혁명이다. 광복 후 남북이 모두 단독정부를 세워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남북에 세워졌다.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가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그는 김구와 쌍벽을 이루는 저명인사로 정치참여를 거부한 김구의 몫까지 차지하는 국민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미 일흔이 넘은 고령이었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건국 초기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

그러나 자신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민당을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자유당을 만들면서 야당탄압과 독재를 능사로 삼는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이승만은 젊었을 때의 지혜와 판단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아집과 독선만이 판치는 한낱 노완(老頑)에 불과했다. 그가 12년 동안 집권하는 동안 정치파동과 사사오입개헌, 삼선개헌 등 요란하고 현란한 독재극은 노대통령을 옹호하던 수많은 지지자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기붕 일당의 요설(饒舌)에 놀아난 것이다.

게다가 후계자로 지목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서 3.15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가 결국 학생들의 궐기를 야기한 것이 4.19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이는 오랜 세월 참고 견디던 국민들이 과감히 일어나 독재를 타파한 것이어서 광복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과 똑같다. 이승만정권은 혁명을 막기 위해서 경찰로 하여금 무자비한 국민 살상극을 벌였다. 186명이 죽고 650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그래도 우리 국민은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혁명법정에 세우지 않고 하와이망명을 허용했다.

민주당정권이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그들은 신구파 싸움에만 골몰하다가 이듬해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군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이로 인하여 4.19혁명을 주도했던 학생세력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지하에 잠적하거나 일부 투항한다. 강력한 저항세력인 4.19혁명공로자들은 군사정권에 의해서 철저히 감시받고 소외된다. 혁명도 의거로 격하되었다. 문민정부에서 혁명으로 부활시켰고 이제는 떳떳하게 건국포장을 수여받은 국가유공자다. 4.19혁명정신은 독립운동과 함께 헌법전문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보상에서 제외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국가보훈처가 자진해서 해야 할 일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호처로 출발했던 군사정권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4.19혁명을 폄하한다. 국회 정무위 법률소위에서 이진복의원 등은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4.19공로자에 대한 보상원칙을 여야가 합의했다. 51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던 문제의 초입에 불을 밝혔다.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큰 분발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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