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면서 어딘가 모르게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김일성에게 정국의 주도권이 몰려가던 어느 날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고당 선생의 사무실에 출근해 일하고 있던 백선엽은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양공설운동장에서 봤던 김일성이 일행과 함께 고당 선생 비서실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젊고 활달해 보였다. 함께 들어선 일행을 압도하는 제스처와 말소리 등이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중략) 김일성에게 백선엽은 어떤 인물일까. 그가 조만식 선생을 자신의 세력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건물 안의 고당 사무실을 찾았을 때 자신을 사무실 한쪽에서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젊은 백선엽을 눈여겨보기나 했을까.”(유광종의 <제너럴 백> 77~80쪽).

백선엽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은 자신을 “한국전쟁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종군했던 군인”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제너럴 백>의 저자는 “이승만을 도왔고, 박정희를 살렸고, 김일성을 꺾었던” 현대사의 거물로 규정했다. 남로당 군사책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박정희의 목숨을 구해준 백 이사장은 낙동강 전선의 교두보 다부동 전투의 영웅이기도 하다.


“전선이 돌파된 위기의 순간, 매일 교회에 나가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님이 떠올랐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신에게 제대로 기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위기가 닥쳐오자 저절로 내 입에서 그 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흘러 나왔다. ‘하나님, 이번 전투에서 아군이 꼭 이기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하시면 평생 당신과 나라를 위하여 살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나는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일단 이동을 멈추고 자리에 앉게 한 다음 외쳤다. ‘수고했다. 그 동안 잘 싸워 주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미군이 싸우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선두에 설 테니 나를 따르라. 만약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도 좋다.’ 이렇게 호소하자 사기충천한 병사들이 빼앗겼던 고지를 탈환했다.”

이승만 도왔고, 박정희 살렸고, 김일성 꺾었다

국군 11연대 1대대가 고지를 뺏기는 바람에 처음 전선이 붕괴됐을 때 분통을 터뜨렸던 미군 대령이 백 이사장을 찾아와 사과했다. “제너럴 백, 미안하다. 사단장이 직접 선두에서 돌격하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다.” 백 이사장은 “다부동 전투에서 우리가 패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위기는 반드시 기회를 선물하는 법이다. 실제로 우리가 혼신을 다해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자 마침내 반전과 역전의 기회가 찾아 왔다. ‘영원한 노병’ 맥아더 장군의 주도하에 전격적으로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보급선을 차단하자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무렵의 강력했던 인민군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반격이 시작되고 서울 수복, 38선 돌파, 평양 입성 등의 승전보가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군사(軍事)와 관련한 다양한 사건과 사연이 생겨났다. 우선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한국인 청년 3만5천명을 부산 근처에서 교육시켜 미군 부대에 편입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카투사(KATUSA)의 연원이다.”

백 이사장은 38선 돌파와 관련한 사연도 소개했다. 사실 이 문제를 두고 당시 한미 양국은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명령에 미국이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동해안의 3사단이 10월 1일 38선을 넘었는데, 나중에 이 날이 ‘국군의 날’이 됐다. 자신이 ‘평양에 최초로 입성한 사령관’이 된 사연도 소개했다.

“밀번 소장이 기동력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앞세워 신속히 진군해야 한다며 나에게 한국군 차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150대 정도 된다고 했더니 미군은 1000대가 넘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군에게는 투지가 있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한국에선 오히려 보병이 이동에 유리할 수도 있다. 평양은 내 고향이라 지리도 잘 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 어느새 눈물을 흘리며 열변을 토하는 나의 모습에 감복했던지 밀번 소장이 작전계획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국군 1사단은 평양을 향해 하루 평균 25km의 놀라운 속도로 진격했다. 내가 1번 전차를 타고 선두에서 적탄을 무릅쓰고 돌진했다. 10월 16일 미 1기병사단보다 간발의 차이로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며칠 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시청 앞 광장에서 이 대통령은 10만 군중을 향해 그 유명한 연설을 했다. “북한 동포가 고생하는데 늦게 와서 미안하다. 우리가 뭉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다. 일치단결해 통일로 가자.” 백 이사장은 단결만 하면 번영할 수 있고 분열하면 희망이 없다는 이 연설이야말로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고 말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더니 중공군이 개입하며 눈앞까지 다가왔던 통일의 순간이 멀어지고 말았다. 인천상륙작전 한 달 전부터 군인을 동원하기 시작한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은 다시 역전됐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의정부 전투에서 전사했고, 74세의 맥아더 장군도 트루먼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때 부임해온 사람이 바로 밴 플리트 장군인데, 휴전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나와 함께 한국군 현대화의 기초를 세웠던 고마운 분이다. 우리는 우선 2천명의 국군 장교를 선발해 미국 17개 보병학교에 유학보냈고, 제주도 모슬포에 10만의 보충대를 훈련시킬 수 있는 군기지도 만들었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한 것도 이 무렵인데, 육사 교정에는 지금도 밴 플리트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단 1인치의 땅도 거저 얻은 것은 없다”

이런 와중에 휴전회담이 거론되기 시작하더니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회담이 열렸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반공포로 석방은 회담이 마무리되어 가던 무렵에 이뤄졌다. 휴전을 원치 않던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의 갈등을 감수하고 밀어붙인 일이었다. 미국의 반발에 이 대통령이 “내가 했다고 그래!” 일갈하던 모습이 백 이사장은 지금도 생생하다.

“1군단장이 된 나는 최초로 구성된 휴전회담 남측대표 5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1953년 7월 27일까지 진행됐다. 시간끌기를 거듭하며 지루하게 이어진 휴전회담은 군사분계선 설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전(高地戰)을 야기했다.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저격능선, 백마고지 전투 등 이제는 전설처럼 들리는 참혹한 진지전이 이 시기에 집중됐다. 어느덧 60만으로 성장한 국군과 40만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을 한 축으로, 중공군과 인민군을 또 한 축으로 한 전선(戰線)이 형성되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무려 2년 넘게 한 것이다. 만약 그때 적군을 격파하지 못했다면 오늘과 같은 영토는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 1인치의 땅도 피 흘리지 않고 거저 얻은 것은 없다.”

백 이사장은 1952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대장)이 됐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미국에 아이젠하워라는 전쟁영웅이 있다면 한국에는 백선엽이라는 전쟁영웅이 있다.” 백 이사장은 워커, 맥아더, 리지웨이, 밴 플리트 등 미국 사령관의 리더십을 소개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을 전시에 조문한 적이 있다. 당시 군산의 비행장에서 근무하던 그의 아들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밴 플리트는 물론이고 워커, 맥아더, 리지웨이 사령관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도 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녀를 전쟁에 참전시켰고,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반드시 배워야 할 리더십의 제1 덕목이다. 리더가 부재할 때 곧바로 공백을 메우는 합리적 시스템도 배워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지휘관에게 사고가 발생하면 아주 빠르게 다음 지휘관에게 지위를 인계한다.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리더가 있어야 하고, 그 리더의 능력에 따라 전력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더를 중시하는 조직이 필승한다.”

출처:정리=정지환 인간개발연구원 편집위원/감사나눔신문 편집국장


백선엽 장군의 이력

▲ 북한 평양사범학교 졸업 ▲ 중국 만저우군관학교 ▲ 제1사단장, 제1, 2군단장, 제1군사령관 ▲ 제7, 10대 육군참모총장 ▲ 제4대 연합참모회의 의장 ▲ 駐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대사 ▲ 제19대 교통부 장관 ▲ 한국후지쯔 고문 ▲ 6.25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상훈> 태극무공훈장, 금탄산업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필리핀 사령관훈장, 미국 공로훈장, 제2회 자유수호의상, 캐나다 무공훈장 外 <저서> 한국전쟁 일천일, 부산에서 판문점까지, 실록 지리산,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 2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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