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갤러리 초대석 그림에 미치다⑨]김종근의 위대한 예술가의 명언과 명화들(화가)
[중앙 갤러리 초대석 그림에 미치다⑨]김종근의 위대한 예술가의 명언과 명화들(화가)
  • 윤장섭
  • 승인 2020.05.18 15: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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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는 모든 것을 곡선으로 아르누보의 위대한 천재”-체코 '알폰스 무하'(1860년 - 1939년 )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조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The artist must remain faithful to himself and to his national roots.)

 

한국에는 훌륭한 화가가 많다. 그러나 알폰스 무하처럼 자신의 조국과 위대한 '슬라브 서사시' 같은 예술을 함께 꽃피운 예술가는 없다.(사진=알폰스 무하)
한국에는 훌륭한 화가가 많다. 그러나 알폰스 무하처럼 자신의 조국과 위대한 '슬라브 서사시' 같은 예술을 함께 꽃피운 예술가는 없다.(사진=알폰스 무하)

한국에는 훌륭한 화가가 많다. 그러나 알폰스 무하처럼 자신의 조국과 위대한 <슬라브 서사시> 같은 예술을 함께 꽃피운 예술가는 없다. 우리 미술사를 둘러볼 때 그런 작가가 없는 것이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슬프다.

▲알폰스 무하는 누구인가?

무하는 화가, 장식미술가로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장식미술가로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체코의 화가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던 슬라브 지역 중 모라비아 남쪽 마을 이반치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온두루 제인은 지방법원에서 안내원으로 일했고, 어머니 아멜리아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무하는 매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무하는 피카소처럼 또한 많은 천재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미술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사진=김종근 교수)
무하는 피카소처럼 또한 많은 천재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미술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사진=김종근 교수)

오죽하면 어머니는 어린 무하가 기어 다니면서 마룻바닥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목에 연필을 묶어 줄 정도였다.

어린 시절 종교적인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성화를 주로 그렸는데, 무하는 이미 여덟 살 때 그린 예수의 <십자가> 작품이 남아 있을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다.

후에 무하는“나에게 성당과 회화 그리고 음악의 개념은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성당의 음악 때문에 성당을 좋아하는 것인지, 성당이 내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라고 할 고백할 정도로 종교적이었다. 또한, 아름다운 알토 목소리를 가진 뛰어난 노래 실력 덕분에 성 베드로 성당에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이때 접한 성당의 예술 건축 프레스코화 조각 등은 소년 무하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무하는 이미 여덟 살 때 그린 예수의 '십자가' 작품이 남아 있을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다.(사진=김종근 교수)
무하는 이미 여덟 살 때 그린 예수의 '십자가' 작품이 남아 있을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다.(사진=김종근 교수)

▲ 포스터 작가로 세기말 아르누보의 일인자로 떠오른 알폰스 무하

묘하게도 열다섯 살 때는 아버지처럼 법원 서리로 근무하며 드로잉을 배웠고, 열일곱 살 때는 프라하 조형미술 아카데미에 거절당한 후 좌절하면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 무대장치를 하는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꿈을 키우던 그는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극장이 불에 타버리면서 해고된 후 초상화가로 일하며 첫 번째 후원자인 쿠헨 벨라시 백작의 눈에 들어 성의 장식을 맡게 되었다.

2년 후 그의 후원으로 뮌헨 아카데미에서 정식 교육을 받고, 스물여덟 나이에 파리로 건너가 잡지의 삽화를 그리며 판화 제작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일생일대의 천운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1894년 34살, 인쇄소에서 일하며 궁핍한 삶을 이어가던 무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밤, 홀로 남은 인쇄소에서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지스몽다Gismonda> 연극의 포스터가 급히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이때 갑작스럽게 무하는 세로로 긴 포맷에 지스몽다의 분위기를 극도로 살린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유행하는 포스터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포스터였다.

무하는 세로로 긴 포맷에 지스몽다의 분위기를 극도로 살린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유행하는 포스터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포스터였다.(사진=김종근 교수)
무하는 세로로 긴 포맷에 지스몽다의 분위기를 극도로 살린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유행하는 포스터와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포스터였다.(사진=김종근 교수)

다음 날 이 포스터를 본 여배우 베르나르는 미친 듯 기뻐했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사람들이 다 떼어 암거래를 할 정도로 포스터는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무하는 일약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고 포스터, 광고, 패키지 등 거의 모든 매체를 독점했다.

마침내 우아한 여성상을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린 포스터 작가로 무하는 세기말 아르누보의 일인자로 떠올랐다. 물론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스페인과 발칸 반도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30대 후반, 그는 37살에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런 열광에 힘입어 무하는 사라 베르나르의 장신구, 의상, 무대 디자인, 포스터를 모두 도맡아 하면서 일약 대중의 우상이 되었고 지스몽다 그림 하나로 당대 최고의 배우와 6년 계약을 맺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국제적 명성을 얻은 알폰스 무하의 그림들은 20세기 접어들어 아르누보와 함께 시각 예술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로 통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만나면서 조각도 만들었는가 하면 프라하도 함께 여행했다.

무하의 인기는 갈수록 폭발적이어서 쏟아지는 장신구 디자인 주문에 지친 무하가 콘셉트 디자인을 모은 책인 "공식 자료집"을 출판할 정도였다. 그의 나이 40세가 된 1900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 전시 및 프로젝트에서 은메달을 수상하고, 1904년에는 드디어 미국 땅을 밟게 된다. 조국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무하를 “포스터 예술가들의 별” 혹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식 예술가”라고 극찬했다. 무하는 그의 그림에 매료된 사람들과 친분관계를 가지면서 뉴욕과 시카고에서 강의와 전시회를 열었다.

▲2016년 다시 만나는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알폰스 무하의 전시는 201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렸다. 이후 3년만인 2016년에 알폰스 무하의 두 번째 전시가 열렸다. 여섯 개의 섹션으로 나눠진 전시는 이전의 전시에서 볼 수 없었던 초기작부터 말년작품까지 무하가 밟아 온 생애와 예술적 흐름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였다.

트기 그래픽 예술가로서의 명작을 만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제공했다. 무하의 작품들은 당시 벨 에포크Belle Époque(아름다운 시기) 때 파리에서 번성하던 새로운 장르의 시각 예술작품들로 이름하여‘무하 스타일 Le style Mucha’로 불리는 아르누보 아이콘의 결정체들이다.

이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는 1890년대 색채 석판화의 발달과 상업 문화 속 광고 등 예술가들의 새로운 예술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이상화된 여성과 장식에 보이는 상징적인 이미지의 오리지널 석판화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가장 크게 주목받은 <지스몽다> 포스터도 결코 빠뜨려선 안 된다.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가로 성장한 무하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된 1890년대를 보여주는 섹션도 지나칠 수 없다. 사라 베르나르를 디자인한 작품을 포함해 상징적인 포스터들과 다양한 상업적인 제품 등 대중적인 ‘브랜드’ 이미지로의 소통을 위한 무하의 디자인 전략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생활 속의 아름다운 영감’ 섹션에서는 아르누보 양식의 이해와 현대 디자인에 끼친 무하의 영향이 어떠했는지를 평가하는 동시에 무하가 디자인한 제품과 패킹 디자인, 파리에서 활동한 보석가 조르주 푸케와의 콜라버레이션 작품도 볼 수 있다.

마지막 구성에서는 무하의 영향을 받은 한국과 일본의 만화가들이 소개된다. 특히 무하 특유의 화려한 장식성과 인물을 중심의 구성은 전 세계 많은 일러스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다양한 만화와 캐릭터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우리는 그 생생한 흐름과 영향을 무하의 작품을 통하여 생동감 있게 확인할 수 있다.

▲조국과 순수예술에 대한 열망을 가졌던 애국적인 화가

무하는 예술가로서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사교성이나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로 성공했지만 늘 가슴속에는 조국과 순수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가졌던 애국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그 증거가 말년에 제작한 <슬라브 서사시> 시리즈이다. 이 작품은 찰스 크레인을 후원자로 만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는데, 자신의 민족 슬라브의 역사를 그리고 싶다는 무하의 오랜 소망을 듣고 그가 경제적 지원을 자청했다.

크레인은 또한 무하를 가족과 함께 체코에 다시 정착하도록 도와주고, 20여 폭의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슬라브 서사시Slav Epic>를 그릴 수 있도록 후원한 훌륭한 파트롱 이었다.

'슬라브 서사시' 그림은 1908년 보스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감상한 후 슬라브 역사와 문화를 작품에 담는데 헌신하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탄생한 작품이다.(사진=김종근 교수)
'슬라브 서사시' 그림은 1908년 보스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감상한 후 슬라브 역사와 문화를 작품에 담는데 헌신하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탄생한 작품이다.(사진=김종근 교수)

이 <슬라브 서사시> 그림은 1908년 보스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회에서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감상한 후 슬라브 역사와 문화를 작품에 담는데 헌신하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슬라브 동포의 정신적인 통합 및 모든 슬라브 국가의 공통된 목표인 정치적 독립을 이루자'는 조국을 위한 충성심만으로 10여 년에 걸쳐 제작한 대작 20점이었다.

그 기념비적인 작품을 무하는 체코 국민과 프라하 시에 엄숙하게 기증했다. 그리고 무하는 79세 생일을 열흘 남겨 둔 1939년 7월 14일에 폐렴으로 장엄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화가였는지는 그의 감동적인 장례식 연설문이 이를 잘 말해준다.

▲체코가 사랑했던 아들 '알폰스 무하'...영원히 기억할 것

“가장 고귀한 장소 슬라빈의 가장 성스러운 곳 비세흐라드 이곳에 체코와 프라하는 당신"을 묻는다. 당신은 이곳에서 히라드차니와 성 비투스성당을 보게 될 것이다.

"어두운 가을에 구름이 당신의 머리 위를 지나고 겨울이 흰 눈이 슬라빈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곧 봄이 다시 올 것이고, 체코 영토의 목초지와 숲은 온통 꽃으로 덮힐" 것이다. 영원한 평화 속에서 편히 쉬거라!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김종근 교수)
(김종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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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현 2020-05-18 16:06:04
"예술가는 유혹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알폰스 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