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흔든 예술가의 명언(19)- 백남준 (1932-2006)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
천재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미술사를 뒤흔든 세기의 혁명가

 

백남준은 항상 허름한 노숙자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사진=김종근 교수)
백남준은 항상 허름한 노숙자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사진=김종근 교수)

백남준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겨울 뉴욕에서였다. 어떤 조각가 전시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그는 신문을 옆에 끼고 편안한 차림으로 화랑에 들어섰다. 도저히 거장의 모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수했다. 항상 허름한 노숙자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서 쫓겨나거나 길에서 적선을 받은 적도 있다는 에피소드가 머리를 스쳤다.

이제 그를 다시 돌아본다는 것은 마르셀 뒤상 이후 현대미술사를 되짚어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현대미술사에 이정표를 세운 작가이다.

▲창의적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어...백남준의 신념

창의적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백남준(사진=김종근 교수)
창의적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백남준(사진=김종근 교수)

“창의적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예술의 세계도 그렇고 삶 자체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창의력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나의 신념이다”라는 그의 말은 유명하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백낙승은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운영한 무역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재력으로 보면 종로 5가와 동대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 이상이 백씨 집안의 소유였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대부였다.

어려서부터 백남준은 남달리 뛰어난 감수성으로, 새롭고 기발한 예술을 생각하는 '아방가르드' 기질을 보였다.일찍부터 음악적 이해가 빨라 고등학교 시절에는 12음계를 만든 독일의 현대 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에 빠졌고 결국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도쿄대에서 쇤베르크를 전공하기도 했다.

한때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빠져 6.25사변이 터졌을 때 ‘마르크스의 군대’를 맞이하고자 피난도 가지 않고 집에서 공산군을 기다린 일이 있다. 하지만 공산군이 집 세간을 털고 개를 몽땅 잡아먹고 도망가자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관성을 거역하는 창조력

백남준은 음악을 ‘소리의 조직’으로 이해하게 된다.(사진=김종근 교수)
백남준은 음악을 ‘소리의 조직’으로 이해하게 된다.(사진=김종근 교수)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음대에 입학한 백남준은 그의 예술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다름슈타트 여름강좌에서 미국인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난 것. 그때부터 그는 음악을 ‘소리의 조직’으로 이해하게 된다.

멜로디나 화음보다 박자나 소음 ,시간,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 이론에 흠뻑 빠진 것이다. 훗날 그는 종종 케이지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고 고백한다.

케이지의 영향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에 심취한 백남준은 1959년 살아있는 수탉과 오토바이, TV 수상기를 연결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어 그는 1960년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사건과 행동으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을 발표한다.

백남준은 1959년 살아있는 수탉과 오토바이, TV 수상기를 연결한 작품을 선보인다.(사진=김종근 교수)
백남준은 1959년 살아있는 수탉과 오토바이, TV 수상기를 연결한 작품을 선보인다.(사진=김종근 교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피아노 연주를 관람 중인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던 그는 결국 과다 노출 혐의로 공연 도중 경찰에 연행되기도 한다.

백남준이 플럭서스에 참여하게 된 그의 나이 29세. 그 뒤로 저돌적이면서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희극적인 행위는 이후 백남준 예술의 근본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백남준 예술의 시기 구분과 작품 제작 배경엔 1961~1964년 고급문화 제도와 전통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전위 예술가 모임 플럭서스 운동이 깊이 개입하고 있다.

‘플럭서스’(FLUXUS)는 미국 건축가 조지 마치우나스가 발행한 잡지 이름에서 차용된 라틴어로 ‘흐름’이란 뜻이다. 플럭서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백남준은 전위적인 예술 활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1961년 열린 제1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브루클린에서 바이올린을 묶은 끈을 질질 끌고 가는 퍼포먼스 ‘길에 끌리는 바이올린’을 선보이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동양의 문화 테러리스트’라고 불렸다. 1963년 도쿄에서 열린 백남준의 공연은 충격 그 자체였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예술과 생애 반려자인 일본인 행위미술가 ‘시게코 구보다’를 만난다.

▲ ‘동양의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

동양의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사진=김종근 교수)
동양의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사진=김종근 교수)

백남준이란 이름이 세계 미술계에 알려진 것은 같은해 독일 파르니스 화랑에서 연 첫 개인전 때다. 그는 비디오 3대, TV 13대와 함께 피가 떨어지는 황소 머리를 전시해놓고 그의 친구 요셉 보이스가 도끼를 들고 나타나 전시중인 피아노를 부숴버리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TV 수상기 13대를 예술로 변형해 일약 비디오아트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1969년작 ‘TV브라’는 상의를 벗은 첼리스트 샬로트 무어만이 양쪽 가슴에 3인치짜리 소형 텔레비전을 매고 첼로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이는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 설정해 시도한 그의 첫 비디오 작품이었으며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연이어 그는 한 평면에 부처와 TV수상기가 고요히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연출한 ‘TV부처’(1974)라는 작품을 통해 텔레비전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한 평면에 부처와 TV수상기가 고요히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연출한 ‘TV부처’(사진=김종근 교수)
한 평면에 부처와 TV수상기가 고요히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연출한 ‘TV부처’(사진=김종근 교수)

소통과 참여를 향한 그의 이상이 반영된 것은 1984년 1월 1일에 열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뉴욕과 파리에서 동시 진행된 이 공연은 이브 몽탕과 같은 팝스타,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알렌 긴즈버그, 요셉 보이스 같은 전위예술가들이 총출연해 큰 볼거리를 제공했다.

‘바이바이 키플링’은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선보였다. 서울, 뉴욕, 도쿄에서 동시 진행된 공연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으며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주제로 뉴욕과 일본의 팝스타,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가야금 주자 황병기, 사물놀이패가 참여했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일 뿐 이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영국 시인 키플링의 주장을 거부한 것이다. 동서양의 만남은 그의 일관된 철학이었다.

▲비디오아트와 미디어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1993년 백남준은 시스틴성당에서 불규칙하게 쌓아올린 빔프로젝터들이 뿜어내는 색색 빛들이 천장과 벽을 수놓는 ‘다다익선’이란 작품을 내놓는다.(사진=김종근 교수)
1993년 백남준은 시스틴성당에서 불규칙하게 쌓아올린 빔프로젝터들이 뿜어내는 색색 빛들이 천장과 벽을 수놓는 ‘다다익선’이란 작품을 내놓는다.(사진=김종근 교수)

1993년 백남준은 시스틴성당에서 불규칙하게 쌓아올린 빔프로젝터들이 뿜어내는 색색 빛들이 천장과 벽을 수놓는 ‘다다익선’이란 작품을 내놓는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은 물건이 많을수록 좋다는 뜻이 아니고 수신자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뜻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구성원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98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에서도 모니터 108개를 쌓아 만든 ‘백팔번뇌’란 작품을 선보였다.

백남준 미술의 가장 큰특징은 비상업성과 대중성, 심각한 사상이나 철학을 배제한 즉흥성을 추구하며 동서양을 구별짓지 않는 아이디어로 작품을 만드는데 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큐레이터 존 핸 하르트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사진술의 발견에 버금가는 미술사적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넓게는 미디어아트의 창시자로, 남들보다 30년이나 앞서 복합매체의 가능성을 예견한 천재였다.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그가 미디어가 문화현상의 도구로 발전할 것을 예견했던 점이 놀랍다”고 입을 모은다.

▲원근법과 사진술 발견에 버금

비디오아트는 20세기 후반 설치미술을 통해 예술의 지평을 좀 더 넓히고 21세기 멀티미디어 예술의 토양을 마련했다.(백 아베 영상합성기 김종근 교수)
비디오아트는 20세기 후반 설치미술을 통해 예술의 지평을 좀 더 넓히고 21세기 멀티미디어 예술의 토양을 마련했다.(백 아베 영상합성기 김종근 교수)

비디오아트는 20세기 후반 설치미술을 통해 예술의 지평을 좀 더 넓히고 21세기 멀티미디어 예술의 토양을 마련했다. ‘예술과 뉴테크놀로지’의 저자 플로랑스 드 메르디외는 비디오아트와 컴퓨터아트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비디오 이미지와 디지털 이미지가 설치미술에 어떻게 도입됐으며 현대미술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분석했다.

백남준은 21세기에는 모든 사고와 행위, 인식이 미디어로 전달돼 또다른 행위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입체파의 콜라주 기법이 유화 기법을 대신한 것처럼 텔레비전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고 발언해 화가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다.

텔레비전 모니터로 만든 캔버스에 대해 백남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정확하고, 파블로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하며, 아우구스트 르누아르처럼 호화로운 색채로, 피에트 몬드리안처럼 심원하게, 잭슨 폴록처럼 야생적으로, 그리고 제스퍼 존스처럼 리드미컬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런 백남준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고 실제로 현대미술은 비디오아트, 레이저아트라는 하이테크 예술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실제로 레이저를 이용해 스크린 없이도 하늘에서 만화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시기가 곧 온다고 예언했다. 이는 흑백TV에서 컬러TV로 바뀐 것보다 더 충격적인 현상이다.

영화와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디지털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이미 30년 전에 실험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구겐하임 미술관도 그를 ‘이미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한순간 깨뜨린 작가’로 분류했다. 특히 백남준의 영향은 빌 비올라, 게리 힐 같은 세계적인 비디오 작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른 것을 맛보는 것이 예술이지 일등을 매기는 것이 예술이 아닌 겁니다

2006년 그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사진=김종근 교수)
2006년 그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사진=김종근 교수)

2006년 그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백남준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겼다. 동료들이 “백남준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미술사에 길이 남을 혁명을 일으킨 한국 작가기에 더 안타깝다.

백남준이 이런 업적을 이룬 것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꾼이기에 가능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그를 추모하는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장례식장을 방문한 유명 인사들과 조문객들이 가위로 서로의 넥타이를 잘라 그의 관안에 넣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지난 1990년 백남준의 절친한 동료이자 ‘현대미술의 개척자’ 조셉 보이스가 숨을 거뒀을 때 서울 현대 갤러리에서 그가 갓과 보이스의 모자를 태우며 넋을 기렸던 ‘보이스 추모굿’을 연상시켰다. 살아있는 동안 백남준이 지켜왔던 파격과 혁신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수북히 쌓인 동료들의 넥타이 조각들 사이에서 백남준은 그렇게 한 시대를 마감했다.

존 케이지가 평소 “만일 내가 죽으면 백남준의 재담을 못 듣게 되는 것이 가장 슬플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

1984 예술사기론을 불러일으킨 백남준. 그는 1962년 관객의 넥타이를 자르고,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면서 “넥타이는 맬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는 파괴적인 논리를 폈던 그도 죽음 앞에선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며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그가 한국인 임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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