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인멸과 도망 가능성 없어
사안의 중대성은 너무 큰데
혐의는 인정하는데 사실관계는 기억 타령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성추행 범죄를 저지르고 물러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구속을 피하게 됐다. 구속의 갈림길에서 살아난 것은 형사소송법상 불구속 수사의 원칙이 구속 필요성보다 더 컸기 때문인데 판사의 이런 판단 자체에 비판이 일고 있다.

오 전 시장은 2일 오전 10시반 부산지방법원에 출석해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영장 기각 소식이 알려진 것은 19시40분이다. 

심사를 맡은 조현철 부장판사(부산지법 형사1단독)는 기각 사유에 대하여 “불구속 수사 원칙과 증거가 모두 확보돼 구속 필요성이 없다. 피의자가 범행 내용을 인정하고 증거인멸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연령 등을 볼 때 도망의 염려도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지만 “범행 장소, 시간, 내용, 피해자와의 관계 등에 비추어 사안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오거돈 전 시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오 전 시장이 귀가하기 위해 차에 탄 모습. (사진=연합뉴스)

결국 판사의 판단이 중요하지만 구속영장 발부 요건은 법률에 규정돼 있다.

형사소송법 70조 1항 1호~3호와 2항에 따르면 ①주거가 없어서 신변 확보가 어려울 때 ②증거 인멸 가능성 ③도망 가능성 ④범죄의 중대성 ⑤재범의 위험성 ⑥피해자 및 주요 참고인에 대한 위해 우려 등 6가지 중 하나 이상에 해당하면 구속시킬 수 있다. 

통상 유력 인사의 범죄 행위는 일반인보다 ④의 기준이 적극적으로 적용된다. 조 판사는 그런 맥락이 아니더라도 혐의 내용상의 ④을 인정했다. 조 판사의 결정은 ①②③에 해당되지 않으니 기각한다는 것인데 반대로 ④⑤에 해당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전국 200여개 여성단체 등이 연대해서 결성한 오거돈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보도자료를 내고 “고위공직자의 성폭력 사건에 대하여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을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던가”라며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한 판사가 이 사안에 대해서 국민에게 던진 대답은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비록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구속에 대한 걱정없이 재판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권력에 의한 성폭력 범죄를 예방하고 공직의 무거움을 알리는 이정표를 세울 기회를 법원은 놓치고 말았다. 피해자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2차 가해로 괴로워하고 있고 언제 다시 자신의 근무 장소로 안전하게 복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피해자는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 했는데 가해자만 구속이 기각된 채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규탄했다.

나아가 “중대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자가 불구속 재판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초범이라는 등의 이유로 가벼운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질까 두렵다”며 “피해자가 밝혔듯이 가해자는 법적 처벌을 받는 명백한 성범죄를 저질렀다. 가해자가 사퇴했더라도 사회적 파장은 너무나도 크다. 고위공직자일수록 더욱 엄중하게 죄를 다스려 공권력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법원은 간과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당초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를 적용하려다가 더 무거운 범죄인 강제추행을 적용했다. 검찰도 경찰의 판단을 존중해서 강제추행 혐의로 영장을 청구했다. 

오 전 시장은 출석하고 귀가할 때 기자들의 질문에 “죄송하다”는 한 마디 외에 묵묵부답이었지만 심사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스스로 범행이 용납이 안 돼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막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항변했다. 

오 전 시장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나아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자기 방어를 시도했다.

이를테면 △5명 이상의 변호인(법무법인 지석·상유) 대동 △사전에 암 수술 진단서 제출 △73세 고령의 나이 어필 △동래경찰서 유치장 대기 중 협압 상승과 가슴이 답답하다며 병원 방문 등이다.

오 전 시장은 변호인단과 함께 △혐의를 전부 인정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 난다고 일관하고 △우발적인 범행이었다는 점을 부각했다. 

실제 변호인은 “부산시장을 지낸 피의자가 자존심으로 자신한테 불리한 건 기억하고 싶지 않고 실제 안 했다고 믿는 인지부조화 현상일 뿐 혐의를 부인하는 건 아니”라고 피력했다.

특히 시장직을 내려놨으면 됐지 법적 책임으로 구속되는 것은 과하다는 정서가 엿보였다. 

반면 담당 검사는 △피해자를 타겟팅해서 로그인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집무실로 호출 △겉으로는 혐의를 인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관계 다툼을 위해 진정성없는 진술로 일관 △범행 이후 은폐 및 조직적 대응 정황 등을 거론하며 오 전 시장 측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고 ‘계획적인 범죄’라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④의 관점에서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면서 2차 피해 우려로 인해 충분히 공개되지 않은 구체적인 범행 내용이 있고, 총선 전 사건 무마(직권남용) 혐의와 더불어 관용차 성추행 등 추가 성범죄 혐의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영장이 기각된 직후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내고 “자체 회의를 열어 향후 수사 방향을 논의하고 오 전 시장이 받은 다른 의혹에 대해서 계속해서 엄정하게 수사하겠다”며 의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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