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와 입체파 '덫'에 걸린 "작은 사슴"이라고 불렀던 여인...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마리 로랑생, 그녀는 스스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다.(사진=김종근 교수)
마리 로랑생, 그녀는 스스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다.(사진=김종근 교수)

“오! 당신은 알기를 원하십니까?
지루한 슬픔보다
불행한 슬픔보다

사악한 마음이 더 나쁜지를...
하지만 사악한 마음보다 더 나쁜 것은 포기입니다
포기보다도 더 나쁜 것은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외톨이가 되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것은
유랑생활입니다..
유랑생활보다도 불행한 것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죽음보다도 더 불행한 것은
잊혀지는것 입니다.”

마리 로랑생, 그녀는 스스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시인 쟝 콕토가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서 덫에 걸린 작은 사슴'이라고 불렀던 여인....

그녀는 불쌍하고 고독한 삵 바느질을 하는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강습을 받다가 화가를 지망하게 된 그녀는 아카데믹한 사실화법을 익히면서 조르쥬 브라크에 의해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고 파블로 피카소와 알게 된 후에는 그를 통하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윙바르의 화실에서 소묘를 배우고 초기에는 툴루즈 로트렉의 우울한 분위기와 그의 정감 넘치는 색채에 영향을 한때는 마네의 자연주의적인 풍경 묘사에 심취하기도 했었다.

당시 입체적인 큐비스트는 아니었지만, 부드러운 색채와 여성적인 감성으로 그녀는 그녀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사랑 관계는 앙리 루소의 초상화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에 다정하게 나타나 있다.

마리 로랑생 자화상(사진=김종근 교수)
마리 로랑생 자화상(사진=김종근 교수)

마리 로랑생은 1905년 당시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공동 작업실이었던 세느강에 떠 있는 세탁선을 가리키는“바또 라브와르”(Bateau Lavoir)에서 피카소, 아폴리네르, 장 콕토, 모딜리아니 등과 교류하며 ‘단순한 형태와 감미로운 색조에 의해 슬픔을 표현한 시적인 여성상’이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냈다.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사진=김종근)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사진=김종근)

특히 그녀는 몽마르뜨의 언덕의 이방인들 그룹이었던 에꼴 드 파리의 작가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면서 몽마르뜨의 뮤즈로서 사랑을 받았다. 비록 처음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화면에 우아한 색조와 단순한 구성으로 투명한 색채의 분위기로 감성적인 시인 아폴리네르와 사랑을 나누며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마리 로랑생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당대 유럽 사회에서 부르주아 여성에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화가로서, 문학가로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걸어간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인, 무대 미술,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밤의 수첩』(Carnet des nuits, 1942)이라는 저서를 출간하는 등 문학가와 화가로서 장밋빛과 청색·회색으로 여성적 세계를 매혹적으로 보여주었다.

1912년의 첫 개인전에서 파리 화단에 지위를 확보한 그녀는 흑인예술이나 페르시아의 세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유로운 화풍과 여성다운 섬세한 관능에 평가를 받았다. 강렬하지 않은 색채와 담홍 ·담청 ·회백색의 감미로운 중성적인 색채배합으로 꿈꾸는 듯한 소녀상으로 환상성을 극대화한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꿈꾸는 듯한 매혹적인 소녀상에 분홍색을 좋아한다 하여 핑크 레이디라고 불릴 정도였다.

 

마드모아젤 샤넬의 초상화(사진=김종근)
마드모아젤 샤넬의 초상화(사진=김종근)

작은 야수, 꽃뱀, 피카소와 루소 사이에서 춤추는 살로메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었던 몽마르트의 천재시인, 아폴리네르로 부터 그 유명한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헌정 받아 더욱 화제가 되었다.

세명의 젊은 여인들(사진=김종근)
세명의 젊은 여인들(사진=김종근)

19C만 하더라도 여류화가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도 큰 원인이 있겠지만, 미술사에 남아 있는 여류 중에 마리 로랑생은 그 작품이나 여성적 분위기에 있어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또한 20C 유럽 전위 예술에 영향을 끼친 디아길레프 창단의 러시아 발레단의 “암사들”이란 작품에 무대 장치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후기로 갈수록 로랑생은 그녀만의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독창적인 화풍과 우아한 자태와 매혹적인 색채, 무희들의 나긋나긋한 움직임으로 많은 사람을 매혹 시켰다.

마리 로랑생의 대표 작품 '키스'(사진=김종근)
마리 로랑생의 대표 작품 '키스'(사진=김종근)

마리 로랑생의 대표 <키스> 작품은 두 여인이 키스하는 장면으로 여성적이며 동성애적인 키스로 에로티시즘을 보여준 그녀의 대표작이 되었다.

파리태생의 작가 써머셋 모옴(1874-1965) 도 남프랑스 비에라에 있는 별장을 장식하기 위하여 몇 점의 로랑생의 그림을 구입하였는데, 그는 1934년 런던에서 있었던 로랑생의 전람회 카탈로그의 서문을 썼다." …더구나 그곳에는 우리들이 한없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파리적 소피스티케이션 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라고 그녀를 기억했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그리고 "광란의 시대 1920년대" 라고 불리워지며 들떠있던 당시의 파리의 사교계, 그러나 시인과의 사랑이 파탄 나자 독일인 남작과 결혼, 에스파냐와 독일로 옮겨 다니면서 그녀는 결국 파리로 되돌아와서 죽었다.

그녀를 치열하게 사랑했던 당대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마리 로랑생의 예술은 우리시대의 명예이다." -

김종근 교수
김종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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