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지금 이 순간』 펴낸 이민숙 시인

사진 제공 / 이민숙 시인
사진 제공 / 이민숙 시인

 

시인

이민숙

 

고추의 시인이고 싶다

마늘의 시인이고 싶다

붉고 매운 고추 위에, 마늘 잎사귀에 내리는 비의 시인이고 싶다

나는 무의 시인이다

대지의 샘물을 빨아먹고 자란, 열다섯 처녀의 흰 뿌리!

절이고 절여져 고소한 액젓이 되어버린 멸치의 시인이고 싶다

 

바다로 풍덩!

검푸른 보라를 품은 빵빵한 갓닢의

톡 쏘는 생강의 시인!

저 목숨들 안에 들락날락

두루두루 함께 살아서 백두랑 한라랑 쓰고 싶은 나는

때론 혁명처럼

김치의 시인이고 싶다

 

저것들 어느 하나 제 몸 갈아엎지 않은 게 있더냐

모조리 녹아버린 완숙의 땅, 있다 없다 무위의 하늘!

난 시인 아니다

난 김치이고 싶다 그저!

 

                                  - 이민숙 시집 『지금 이 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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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 詩人이라는 호칭을 우러러보며 동경했었던 소녀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문학 언저리를 맴맴 돌다보니 시인이라는 호칭도 얻게 되긴 했다. 가끔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내게 가당키나 한지, 정체성에 가끔씩 기습하는 혼란한 마음과 부끄러움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번뇌였다. 오늘날 시인이 너무 흔해빠져서 詩人이라고 시인하고 싶지 않다는 어느 선배의 취중진담이 떠오를 때마다 나 자신을 살펴보게 되곤 한다. 여기 화자 역시 그러한 자아성찰과 자기검열의 시간을 많이 가져왔을 터, 시의 행간마다 고뇌의 흔적이 진하다. 이런 감정을 동병상련이라고 하는가보다. 우리네 식탁에 빠져서는 안 될 김치를 성찰해보자. 김치가 흔한 먹거리인 것 같지만 결코 만만한 레시피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진정 김치 같은 시인 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 한 시인의 소망 진술서를 읽는다. 절이고 절여저 마늘 생강 무, 액젓과 혹은 맵싸한 고춧가루 등과 어우러지고 잘 스며들어 발효되어 김치로 완성되는 그런 김치 같은 시인이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갈아엎는 혁명적인 일, 아니 혁명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고스란히 나를 온전히 바쳐서 완숙된 시를 쓸 수 있는 자 몇 명이나 있으랴! 잘 숙성된 김치 같은 시 한 수에 마음 씻는 시간이다. 김치 같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화자의 소망에 박수를 보내는 마음이다.

[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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