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장군의 마지막 가는길에 하늘도 울었다...빗속에 추모행렬 이어져
백선엽 장군 100세 일기로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서 영원히 잠들어
과(過) 보다 공(功)이 많은 전쟁영웅...한쪽에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취급

[중앙뉴스=윤장섭 기자]자유 대한민국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낸 이시대의 진정한 영웅(英雄)이자 모든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100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고인이 된 "故 백선엽 장군에게 붙는 수식어는 6.25전쟁 영웅"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6.25 전쟁 영웅에는 '맥아더' 장군과 '리지웨이' 장군, '백선엽' 장군, '김동석' 대령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지난 10일 고인이 되신 백선엽 장군이 왜 6.25전쟁 영웅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 10일 고인이 되신 백선엽 장군(사진=대한민국 육군)
지난 10일 고인이 되신 백선엽 장군(사진=대한민국 육군)

故 백선엽 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해 2020년 7월 10일 사망하기 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이시대"의 산 증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4성 장군으로 6.25전쟁때 북한의 인민군에게 공산화 될 뻔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저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인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이력때문에 친일 인사로 분류되기도 했다. 실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705인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래서 고인은 전쟁영웅이라는 수식어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불명예스런 이름표가 항상 붙어다닌다.

고인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과 암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故 백선엽 장군은 과(過) 보다는 공(功)이 많은 입지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자유 대한민국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낸 이시대의 진정한 영웅(英雄)이자 모든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100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사진=연합)
자유 대한민국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낸 이시대의 진정한 영웅(英雄)이자 모든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100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사진=연합)

▲故 백선엽 장군의 일생

"고인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다. 주로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으며 부친인 백윤상 님은 고인이 7세때 돌아가셨다".

"고인은 평안남도 강서에 있는 약송소학교를 나온 뒤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해 1939년 3월에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잠시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해 제9기로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군인으로서 "첫 근무지는 자무쓰 부대였다. 2년 뒤인 1943년 고인의 인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이 찎히게 되는 '간도특설대'로 전근하게 된다. 고인은 이곳에서 3년간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소속 게릴라 부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잔혹한 토벌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에는 "1938년부터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던 사회주의 추종 인물인 김일성과 강건, 김광협, 최용건 등이 활략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전입했던 시기에 이미 김일성 및 만주빨치산파 독립운동가들은 간도특설대의 토벌을 견디다" 못해 동북항일연군을 빠져나와 소련 연해주로 망명하여 소련군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실제 고인은 독립운동가들을 맞상대할 일은 없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많은 인사들이 고인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알고 있다. "고인도 자신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1983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에서 밝히기도 했다. 또 "고인은 한국어 자서전인 '군과 나'(1990년), '실록 지리산'(1992년) 등에서"도 간도특설대 경력을 짧게 언급했다.

"고인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고인이 3년간 재직한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에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창설되었다.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다. 고인은 살아생전 간도특설대 경력을 인정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했으나 적극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 "그 이유는 고인이 토벌한 소위 독립 운동가들이라는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계 빨치산 출신들이어서 크게 죄스럽지는 않다"고 생각 했다는 것,

그래서 "고인 스스로도 간도특설대 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하지는 않았다". 고인은 이후 만주군 중위로 군생활을 마치고 해방 직후 평양으로 돌아와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있다 1945년 12월에 월남했다.

"고인은 남쪽으로 월남한 이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뒤 1946년 2월 제5연대 A그룹 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복무했다".

고인은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4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제1사단장으로 개성 지역을 담당했다.(사진=연합)
고인은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4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제1사단장으로 개성 지역을 담당했다.(사진=연합)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4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제1사단장으로 개성 지역을 담당했다. 6.25를 불과 몆일 앞두고 고인은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 간부훈련을 받는 중 이었다".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고인의 대표적인 어록 중에 6.25 전쟁 당시 부하들에게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쏘라고 한 말이 있다. 백선엽 장군은 이 한 마디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서 전세를 뒤집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우리 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수도 서울을 비롯해 국토의 대부분을 김일성이 이끄는 인민군에게 내주어야 했다. 당시 개성 1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도 낙동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낙동강을 내주면 모든것이 끝나는 상황에서 "고인은 더이상 후퇴할 수도 없다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낙동강 다부동에서 배수의 진을 친 고인은 사기가 떨어질 대로 다 떨어진 국군에게 입을 열었다. "적은 다가오는데 우리가 지금 갈데가 없지 않느냐 바다 밖에 갈데가 없는데 제발 날 따라서 돌격을 하자. 만약에 내가 후퇴하면 날 쏴라." 고 했다.

"죽기 살기로 대구 진출의 관문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우리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1950년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평양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故 백선엽 장군은 "당시 대령의 계급으로 광주에 주둔한 제5사단장으로 복무하다 1950년 4월 22일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백선엽은 6.25 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있다"가 07시경 부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선엽 장군이 수색의 사단사령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개성은 함락되었고 12연대와의 연락도 두절된 상태였다. "백선엽은 인민군의 남침을 막으려고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이때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렸고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후퇴를 하라는 명령조차 내리지 못했다. "퇴로가 끊긴 1사단은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했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를 구하지 못해 몇명의 부관과 함께 행주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에 성공했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한 1사단은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다. 당시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의 6사단, 그리고 강릉의 8사단이 유일했다".

"6.25전쟁이 일어난지 1개월만에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하여 불과 5주 만인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유역까지 손에 넣었다.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 3개 사단"을 동원하여 더위가 한창이었던 8월에 총 공세를 벌였다.

"한국군은 6.25전쟁에서 가장 큰 고비를 맞는 순간이었고 국군과 미8군은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방어전을 펼쳤다. 8월 3일부터 시작된 '낙동강방어선전투(洛東江防禦線戰鬪)'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9월 18일까지 한달 반 동안 계속됐다.

북한군이 난동강 전투에 사활을 걸었던 것은 대구에는 대한민국 정부를 비롯해 육군본부와 미8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은 이곳을 점령해야 남한을 공산화 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결국 인민군도 총 공세에 나섰다.

인민군은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를 동원해 칠곡 전선을 방어하는 국군1사단을 집요하게 맹공격했다. 이때 백선엽 장군이 이끌던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총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총력 방어전을 펼쳤다.

"국군 1사단은 낙동강 전선 중에서 칠곡을 중심으로 북쪽 방어선과 서쪽 방어선이 만나는 모서리에 있는 방어선"을 담당했다. 대구를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칠곡을 기준으로 북쪽 방어선은 국군 1사단, 6사단, 7사단, 8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방어를 맡았고, 칠곡 이남 서쪽 방어선은 미군 24사단, 2사단, 25사단, 해병대 1대대, 1기병사단"이 방어를 맡았다.

칠곡 인근 낙동강 전선에서 "8월 한달에 걸쳐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다". "낙동강방어선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고, 6.25전쟁 전체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다. 백선엽 장군이 이끌던 국군 1사단이 다부통 전투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더라면 대구를 내줄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1사단을 중심으로한 국군은 미8군의 도움을 받아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곳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미군은 "백 장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를 하자 이전까지 갖고 있었던 선입견을 모두 버렸다"고 한다. "미군은 한국군이 북한군만 보면 도망가기에 바쁜 군대라며 한국군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으나 다부동 전투에서 1사단이 절대 열세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달 동안 막대한 희생을 감내하면서 끝내 다부동 전선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고 한국군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것,

▲한국군의 전투력 의심한 美 지휘관들...백선엽의 말 한마디에 자신감 얻어

"맥아더 장군의 기습적인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과 국군은 북한으로 역진공하기 시작했고 인민군들은 북으로 계속 후퇴를 거듭했다. 앞서 지적한 대로 미군 지휘관들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해 국군의 전력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백선엽 장군은 직접 영어로 미군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백 장군은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평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았기 때문에 길을 잘 알고 있고 미군과 같은 종합적인 화력이 없을 뿐,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대대를 지원해주면 미군들과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 미군 장교들은 백 장군의 말을 의심했다. "바로 기계화로 무장한 미군을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는지를 의심한 것"이다. 당시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빨랐다. 이런 점들 때문에 "한국군이 미군의 속도를 쫓아오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미군 장교의 속내를 잘 이해하고 있는 "백 장군은 한국군은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할 것이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고 했다. 미군 장교들은 결국 백 장군의 설득에 미군 전차대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는 실로 놀라운 결정이다.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지휘관이 맡아 지휘를 한 적이 있을뿐 거의 없다.

미군 장교들의 판단은 적중했다. "실제 백선엽 장군은 미군 장교들과의 약속대로 1사단 장병들이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미군들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며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는 뜻을 전했고 백 장군은 미군 전차대대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자 미군 전차대대는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는 등 전쟁에서 사기가 매우 높았다.

당시 "미군 장교들이 한 말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는 기막힌 대답이다.

백 장군은 10월 19일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6.25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다. "1사단과 함께 평양 점령에 앞장섰던 7사단 역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날 평양에 입성했다".

한국군은 평양을 점령한 뒤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라 통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말, 김일성의 구원 요청을 받은 수십만의 중공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12월 4일, 평양을 다시 내어주고 38선 이남으로 후퇴"를 해야 했다.

백선엽 장군은 1.4 후퇴 기간 중공군의 맹공세에도 제1사단의 건제를 유지한 채 성공리에 퇴각작전을 마무리했다. 이어지는 반격작전에서도 미군 제1군단 예하로 서울 탈환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3월 28일에 제1군단 군단장이던 김백일 소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 소장 후임으로 백선엽이 4월부터 제1군단 군단장 직을 수행하게 됐다".

▲가장 젊은 육군 대장 백선엽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브리핑하고 있는 백선엽 준장(왼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브리핑하고 있는 백선엽 준장(왼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백선엽은 "1952년에 새로 창설된 제2군단 군단장을 맡게 되었다. 2군단은 미군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이 적극 지원했다. 1952년 7월에는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953년 1월 31일, 그 동안의 전공으로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었다". 이때 백선엽의 나이가 불과 33세였다.

이후 "6.25전쟁은 종전을 맡게 되었다. 백선엽 장군은 고인이 되기까지 과보다는 공이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자 유능한 장수였다.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까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당신이 6.25 전쟁 기간 동안 참여한 수많은 전투에서 지휘관의 판단 잘못으로 부대가 궤멸되거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등 미군 장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백선엽의 정확한 판단 능력과 지휘 능력 덕분에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고 이념이 다른 공산국가와의 전쟁을 치르는데 가장 믿을만한 동맹군이라는 신뢰"를 쌓을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군은 "6.25 전쟁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국군을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군대"로 평가했다.

"미군은 한국군을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조잡한 민병대 정도로 폄하했고,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할거라"며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인색한 장군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군은 백 장군과 같은 유능한 지휘관 덕분에 전쟁 후반으로 갈 수록 미군들의 불신을 해소하고 목숨을 건 전쟁에서 가장 믿을만한 동맹군이자 파트너"로 인정하게 됐다.

"백선엽 장군은 4.19혁명 이후인 1960년 5월 31일 군복을 벗고 두달만인 7월에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백선엽 장군이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부임한 이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고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군부의 강한 영향력을 가진 백선엽의 개입을 막기 위해 계속 대사 직책을 주어 외국을 떠돌도록 했다. 1961년 7월 주 프랑스 대사(유럽 및 아프리카 13개국까지 관할)로 발령받아 유럽에 머물다 1965년 7월 다시 주 캐나다 대사로 발령 받고 다시 미주에 머물렀다".

박정희는 10년이 지난 뒤에 백선엽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1969년 10월 교통부장관(19대)에 임명했다. 교통부 장관 이후에는 충주비료의 사장을 맡았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호남비료 사장을 겸직해 1973년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1980년까지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다 퇴임했다.

▲이빨 빠진 노장군의 마지막 가는 길

"백선엽은 한국종합화학 사장에서 퇴임을 한 뒤에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고 기념활동에만 참가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고인이 되기 전까지 "백선엽은 미군 장성들로부터 영웅으로 칭송을 받았다. 특히 6.25전쟁 시기 미군 장성들은 백선엽에 대하여 존경했고 지도력을 높이 평가했다. 주한미군과의 관계는 더없이 돈독했고 평안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군들은 백선엽을 유능한 장군 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미군들은 "백선엽을 영웅으로 존경하고 미 2사단 훈련평가원실 건물조차 '백선엽관'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현재도 백선엽의 6·25전쟁 경험담 육성녹음은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정도다".

백선엽은 2013년, 미8군 명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2016년에는 미8군 사령관 이, 취임식에도 초대되었다. 백선엽은 한국군보다는 오히려 미군들이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부르며 극진히 예우해왔다. "주한 미군은 2013년 그를 '명예 미8군사령관'으로 위촉해 각종 공식행사 때 주한 미8군사령관과 같은 예우를 해왔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은 백선엽 장군에게 한국군 최초 원수 계급을 부여하려 했다"가 간도특설대 경력 때문에 반대가 심해 취소했다. 대표적으로 반대한 인물이 바로 채명신 장군이다.

"백선엽의 전투 활약상을 담은 ‘6·25 전쟁영웅의 투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가 2016년 5월부터 9월까지 육사 누리집에 30회가 연재되었다"가 2017년 일반에도 공개되었는데, 당시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언급하지 않고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8년 육사 누리집에서 삭제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 국군의 뿌리를 광복군에서 찾으려는 노력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육군 관계자는 "백 장군 웹툰 삭제와 국군 역사 재조명은 무관하고, (새로운 웹툰 게재로 인해) 기존의 백 장군 웹툰이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대북정책에 반대해왔으며 9.19선언에 반발해 기존의 성우회, 대한민국재향군인회와는 다른 대한민국 수호 예비역장성단이라는 단체를 조직,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폐기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노병은 "2020년 7월 10일 23시 35분 100세 생일을 4개월 앞두"고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노 장군의 빈소가 서울대 병원이 아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것은 지난 9일 백선엽 장군보다 하루 전에 사망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빈소가 차려졌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의 거물급 정치인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존경받던 노 장군이 박원순 시장과 같은 장례식에서 동시에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성격이 틀리기도 하고 또 조문을 오는 인사들 역시 틀려 자칫 지지세력들 사이에 부딧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고인이 된 두사람은 성향이 정 반대인 만큼 조문객들 사이에서 다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故 백선엽 장군은 장례식 후 유족의 신청으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하루 먼저 사망한 박원순 시장의 장례식 보다 백선엽 장군의 장례식은 국민들 사이에서 덜 주목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6.25전쟁 영웅을 추모하는 국민들의 조문행렬은 박 시장의 조문 행렬보다 더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이 고인이 된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사진=연합)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이 고인이 된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사진=연합)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과 박한기 합동참모본부 의장도 13일 빈소를 찾아 ‘한미동맹 영웅’의 넋을 기렸다. "나란히 선 둘은 영정사진을 향해 절도 있는 거수경례"를 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백 장군의 장남 백남혁 씨(67)에게 “그는 한미동맹의 심장이자 영혼이었다. 백 장군의 복무에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이날 트위터를 통해 추모 메시지"를 전했다.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이날 트위터를 통해 추모 메시지"를 전했다.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이날 트위터를 통해 추모 메시지"를 전했다. 미 NSC는 "한국은 1950년대 백선엽과 다른 영웅들이 공산주의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데 모든 것을 바친 덕분에 오늘날 번영한 민주 공화국이 됐다"면서 "우린 백 장군을 애도하고 그의 유산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한편 "故 백선엽 장군의 사망과 관련해서 더불어민주당 측은 친일행적을 고려해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으나 "미래통합당에선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라며 애도했다".

 "故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은 15일(수요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거행된다. 백 장군은 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이 지난 1996년 만장됨에 따라 장례 후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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