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기타와 바게트』 펴낸 리호 시인

사진 제공 / 리호 시인
사진 제공 / 리호 시인

 

흘러가다

리 호

 

힌트 한 번 없이 마른 여름이 오고

재기도 전 투명한 봄이 간다

 

알람은 정확하게 맞췄나?

 

천둥 친다

꺾어 신고 쏘다닌 어제의 뒤축을 펴고 연체료 붙은 비 수금하러 가는 7월 1일

 

부도 낸 여름을 찾았다고 장수보신탕 사장에게 연통을 넣었다

 

세 번 유찰된 장마는 손가락 굵은 겨울에게 낙찰되었다

 

발정 난 토끼 같은 작달비의 발원지를 찾다가 포기한 8월 8일

 

소개 없이 치외법권인 가을이 오고

기록하기 전 순한 겨울이 간다

 

                                                  - 리호 첫 시집 『기타와 바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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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흐름, 흘러감의 법칙은 존재한다. 흐름의 진리가 없다면 지구, 아니 인류는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꼬리가 가늠 되지 않는 불같은 시련에 데여본 적 있는가? 비워도 비워내도 비워지지 않는 그 슬픔의 잔, 그 멍에에 몸부림쳐 본 적 있는가? 하지만 그대, 안심하라! 절대적 절망도 절대적 슬픔도 영원하지 않으리.

맘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적 고통도, 단절과 별리, 절망적 상황도 이러한 소멸과 생성의 법칙(?)이 있기에 살아갈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나보다. 빗소리 속에 돌아보니 흘러가서 저 멀리 바다에 묻혔는지 흔적 묘연한 눈물, 한숨, 원망, 열정들이 무상하다. 기억이란게 있는 한 불쑥불쑥 욱신거리는 이 상처를 없앨 수는 없다는 한계점, 오히려 그래서 감사하는 시간들이 내게도 있다. 알람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아침이 지나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고 있다. 오늘 좍좍 퍼부어대는 장맛비도 아우성 속에서 흘러가겠지. 흘러감을 따라 흘러오실 가을 그리고 겨울을 기대하며 이 시가 주는 위로에 젖어본다. 지난 해 마른장마가 배경이었을 위 시가 자꾸만 처연하게 가슴을 때리는 건 왜일까? 아는 이는 아시리라. 시인은 시로써 울고 웃기도 하며 위로를 얻기도 한다. 살다보면 그럴 일말의 힘도 증발해버린 극한의 슬픔도 있지만 ‘치외법권인 가을이 오고 / 기록하기 전 순한 겨울이 간다’ 는 시인의 고백에 한 줄기 위안과 희망을 얻는다. 화자 역시 그러하기를, 그러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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