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갤러리 초대석 그림에 미치다⑮]김종근의 위대한 에술가의 명언(화가)
[중앙 갤러리 초대석 그림에 미치다⑮]김종근의 위대한 에술가의 명언(화가)
  • 윤장섭
  • 승인 2020.08.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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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창조 - 만 레이 Man Ray (1890-1976)
“나는 단 한 번도 어떠한 그림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어리석은 영역일 뿐이다”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 작가, 영화감독 등등 늘 그의 이름 앞에 따라 다니는 만 레이(1890-1976)의 또 다른 이름 들이다. 만 레이, 그는 단순한 사진작가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시대 예술의 “ 창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예술가” 이다.

만 레이(1890-1976)(사진=김종근 교수)
만 레이(1890-1976)(사진=김종근 교수)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사진이 아니다".

우리가 그에게 이렇게 거창한 칭호를 부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보통 그의 작품들은 1912-21까지의 뉴욕 시대, 1921-40의 파리 시대 1940-51까지의 할리우드 시대, 1951-76의 마지막 파리시대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에게 작품을 분류하는 시대적인 구분은 그다지 특별한 의미가 없다.

만 레이는 언제든 그가 가진 모든 예술적 영감과 천재적 감흥을 어디서든지 유감없이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 나에게 최근 작품이란 것은 없다“ 라고 했던 것처럼 그는 제작 연도 표시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사진이 아니다". 라는 경계에서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에겐 재료나 물질 어느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피카소나 세잔이 이룩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거나 완성 시키기보다는 예술의 열린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는데 평가가 높다.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 그가 펼쳐 놓은 예술세계의 편력이 어떻게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상호 영향 관계를 주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떻게 한 작가의 양식으로 옮겨가 현대미술에 자리매김하고 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Symphony Orchestra1916. Oil(자료=김종근 교수)
Symphony Orchestra1916. Oil(자료=김종근 교수)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더 알려진 작가

만 레이 Man Ray의 예술과 삶에 여정을 간략하게 더듬어 보면, 만 레이라는 예술가는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미국에서 알려진 예술가가 아니라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더 알려진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1890년 8월 27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1911-1912 그의 나이 20대 초반, 뉴욕에 와서 페레센터와 사진작가 스티글리츠 갤러리에서 데생 수업을 받았다. 스티글리츠는 세잔 피카소 피카비아 브랑쿠지 등을 기획 전시한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화상이었다.( 만 레이는 당시에 그를 모델로 한 스티글리츠의 초상 그림과 “마을”이라는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그 그림은 거의 세잔의 작품을 떠올릴 정도로 유사성이 있다. )

만레이 반전.1931.(자료사진=김종근 교수)
만레이 반전.1931.(자료사진=김종근 교수)

그는 1913년 미국의 혁명적인 전시로 알려진 “아모리 쇼”에서 그는 피카비아를 만났고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라는 작품으로 당시 스캔들을 일으킨 마르셀 듀샹을 처음 만났다. 그는 듀샹의 사진을 그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살 정도로 우호적이었으며 듀상 자신조차도 기자의 질문에 “당신 아느냐 내 이름은 만 레이”라고 할 정도로 50여 년이라는 긴 우정을 지속했다.

그것은 서로에게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921년 그의 나이 31살 파리에 도착한 그는 마르셀 듀상의 소개로 당시 유럽 화단을 휩쓸기 시작한 다다이스트 앙드레 브르통, 시인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을 만났다. 그해 12월 그는 뉴욕에서 제작한 작품들로 서점 '6'에서 전시를 했고 여기서 그는 그의 모든 사진 작업에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고 몽파르나스 예술가들 사이에 유명한 키키(kiki)를 만났다.

그녀는 후지타, 앙드레 드랭, 모딜리아니 등의 주요 모델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만 레이와는 가장 격정적이고 파란만장한 연애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만 레이의 Les larmes de verre(자료사진=김종근 교수)
만 레이의 Les larmes de verre(자료사진=김종근 교수)

몽파르나스에 유명한 카페 돔과 카페 로통드등에서 였다. 이때부터 만 레이는 피카비아와 쟝 콕토의 도움으로 피카소 브라크 등의 많은 화가의 사진을 찍어 주는 전업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사진작가이지만 그는 그림이 될 수 있는 것과 사진이 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했다.

그는 매우 명료하게 그 자신의 작업 태도에 관해 주장한다. “사진으로 존재할 수 없을 때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나는 그림 그리기를 원하지 않을 때 나는 사진작가다. 만약 어떤 인물이 내게 흥미 있을 때, 얼굴이나 누드나 나는 내 카메라를 사용할 것이다. 이것이 데생이나 그림보다" 더 빨리할 수 있으므로. 그러나 어떤 것을 내가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예를 들면 꿈이라든가 무의식적인 충동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데생이나 그림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그림과 사진은 표현을 위한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림을 위해 사진을 희생시키지도 않았고 그 둘의 길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가 만든 오브제까지도 그에게 있어 “그림과 사진”의 관계처럼 서로 질투하지도 않고 경쟁 상대도 아니고 그들이 작가의 길이 있을 뿐인 그런 평행의 관계이다. 

만 레이의 근본적인 예술정신과 관심은 생각( Idee ),  즉 상상력에 의한 제작과 생산에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그림”에 대한 에세이서 단호하게 “나는 그림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번도 미적 완성을 탐색한 적이 없는 작가 '만 레이 Man Ray'

아름다움 그 자체만을 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한 번도 미적 완성을 탐색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 “나의 작품에 대해서 기술적인 능란함에 찬탄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라고 기술적인 완성으로 예술품을 보는 것을 거부했다.

앵그르의 바이올린 1924년(자료사진=김종근 교수)
앵그르의 바이올린 1924년(자료사진=김종근 교수)

그가 초현실주의작가들 가운데 오브제를 예견한 선구자이기도 했던 그는 동시에 “나는 단 한 번도 어떠한 그림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어리석은 영역일 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미적인 평가에 반항적이었다.

“우리는 어떤 이전의 거장보다도 잘할 수도 없고, 우리는 다르게 할 수도 없다. 나는 모른다 어느 것이 오리지널이고 더 모던 한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상력에 의한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만 레이를 사람들은 종종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마르셀 듀샹과 비교 (Arturo Schwarz, “The Rigour of Imagination” ) 한다. 그의 사진조차도 그래서 “하나의 대상을 담아내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상상력을 생각 (idee)를 그대로“ 담아내는 거울” 일 뿐이다. 그런 그의 의지는 다양한 실험을 통하여 사진기법도 다양하게 구사되었고 그는 "레이요 그람" 이라는 작품들을 발명하기도 했다.

▲ '만 레이 Man Ray'의 예술작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초현실주의 화가들

1925년 그는 주로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전시를 했는데  아르프 ,키리코 , 에른스트, 클레 , 마쑝, 미로 등이 그들이었다. 그는 니스와 앙티브 칸 지역을 잇는 프랑스 남불 최대의 휴양지 코트 다 쥐르에서  피카소, 엘뤼아르 등과 같이 보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전 예술작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가 교류한 예술가들과의 몽타주 “ 바둑판의 쉬르레알리스트” 작품사진에서 그의 폭넓은 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그리트 탕기와 더불어 브뤼셀에서 초현실주의 3인전을 가지기도 했고 폴 엘뤼아르의 서문으로 데생 집을 펴내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데생을 남기고 있고 유화 작품도 오브제 못지않게 치중했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동시에 그는 그림을 그리며 사진 작업을 늘 병행했다.

1940년 7월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많은 사진과 오브제로 이름을 얻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는 곧 헐리우드에 정착했으나 1951년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만레이 행운.1938년.61x73cm뉴욕(자료사진=김종근 교수)
만레이 행운.1938년.61x73cm뉴욕(자료사진=김종근 교수)

이미 개인 전시 등을 통해 알려진 그는 1960-61년 사진 작업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1966년 파리 취리히 밀라노 등에서 열린 다다 50년 전에 참가하고 L . A 의 카운티 뮤지엄에서 처음으로 300여 점의 작품을 모은 작품전이 열렸다. 1976년 다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160여 점의 사진작품을 전시하고 11월 18일 파리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  “그림은 곧 상상력”이라고 믿었던 예술가 '만 레이 Man Ray'

그는 예술이라 불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를 실험했고 창조하고 보여주었다. 그의 예술작품은 모든 오브제와 에스키스, 사진,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정신은 걸쳐져 있다. 그것은 언제나 실험이었고 완성이었고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마치 그의 예술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 내지 못한 예술가처럼 비쳤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것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려 했던 특이한 예술가의 한 전형을 보인다.

“그림은 곧 상상력”이라고 믿었던 예술가, 그러나 우리는 그의 다양한 작품에서 지금 현대 화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원형 또는 뿌리의 가닥을 발견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이 가지고 있는 복수의 이마쥬( Image ) 나열 방법과 만 레이의 복수 작품의 개념, 그리고 그의 실크스크린의 표현기법과 만 레이가 보여준 “브르통”의 사진이나 음화로 나타난 “누드” 표현기법 등의 영향 관계,

1920-64년까지로 표시된 나무 옷걸이를 걸어 놓은 “의사방해”( Obstruction )라는 작품과 기묘하게 닮은 칼더가 1932년에 고안한 움직이는 조각 “모빌”과의 관계, “성인을 위한 알파벳”과 르네 마그리트의 “환상의 열쇠” 또한 모든 그림 대신 글자로 쓰는 벤의 작품, 모든 사물을 덮어씌우고 동여매는 크리스토의 작품과 1920년대의 만 레이의 “이시도레 듀카스의 불가사의” 

“복원된 비너스”와 한스 벨메르의 누드를 묶은 작품들, 그의 사진 “흑과 백”과 브랑쿠지의 얼굴 등 현대의 무수히 많은 사진 작업에서 발견되는 만 레이의 “모범 사진” 등 레제의 작품과 그의 큐비스트 적인 표현, 아마도 현대의 많은 작가와 사진작가들 중 그 누구도 만 레이를 지나치거나 피해 갈 수 없을 만큼 그의 작업세계는 광범위하고 전 분야에 걸쳐 있다.

특히 누드, 인물의 표현, 합성된 꼴라쥬, 오브제의 기발한 차용 등에서 21세기 미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만 레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그를 통해서 또 다른 현대미술의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김종근 교수
김종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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