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방기하다
노숙자와 재벌총수도 국민이다
당명에 가치관이 안 드러난다
제3지대와 중도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미래통합당이 당명을 ‘국민의힘’으로 바꿨다. 

보수정당에 몸담고 있는 절친한 원외 인사가 왜 당명을 지을 때 대국민 공모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먼저 치열하게 내부 토론을 거친 뒤 당명 후보군을 정해서 국민들에게 여론조사를 하는 방식도 아니고 처음부터 공모를 하겠다니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영국에 보수당이 있듯이 보수당으로 가보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당명은 타인에게 “지어주세요”라고 맡겨둘 것이 아니라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자기 색깔을 잘 반영해서 선보인 뒤 평가를 받는 게 맞다. 

많은 사람들이 “국민”이란 단어를 선호했기 때문에 국민을 꼭 넣어야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당명은 간단명료하게 당의 핵심 가치를 드러내줘야 한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선택의 예술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에서 선택과 집중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정당은 어떤 정책을 중점적으로 가져갈지, 수많은 유권자들 중에 누구를 대변할지, 무수한 가치와 이념 중에 어떤 것을 표방할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국민”은 그 선택을 방기한 표현이다. 청년도, 기성세대도, 노인도, 노동자도, 학생도, 재벌총수도, 노숙자도 전부 국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도 국민이고 기득권층도 국민이다. 국민의힘은 누구를 대변하겠다는 건지 당명만 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모든 정치인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다.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규제완화를 추구하는 정치인도, 노숙자의 권익을 위해 최소 주거조건을 보장하는 입법을 추진하는 정치인도 모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이념적 포괄 정당(Catch-all-party)이다. 그 어떤 계층도 명시적으로 배제할 수 없고 모두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렇지만 정치는 결국 선택을 요구하는 분야다. 정당은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가치를 표방하고 있는지 당명에서 드러내주는 게 좋다. 더불어민주당은 함께 가는 민주국가를 표방한다. 정의당은 정의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 민생당은 서민의 민생 문제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실제 이름에 걸맞게 활동하고 있는지와는 무관하게 추구하는 가치를 당명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 좋다.

국민이란 것은 그런 선택을 피해가는 모호한 레토릭에 불과하다. 

한국 정치에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쪽이 아닌 그 중간에서 제3지대 중도의 길을 개척해보겠다고 도전했던 역사가 있다. 그런 식의 제3지대 실험은 20대 국회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21대 국회에서는 국민의당과 시대전환 딱 4석 밖에 없다. 거대 양당을 모두 비토하는 길에는 꼭 가운데 영역만 있는 게 아니다.

정주식 직썰 편집장은 “보통 우리가 한국 정치에서 제3지대를 얘기하면 민주당과 통합당 사이에 그 지점을 연상하는데 그곳은 중도 정당들의 무덤이었다. 이번 총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가 뭐냐면 그 사이의 지점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한국에서 제3지대가 꽃필 곳은 민주당의 왼쪽이 아닐까 싶다. 그 땅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척박했기 때문에. 만약 연합 진보정당 체제(진보 빅텐트)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다음 총선 즈음에는 그쪽에서 확실한 그야말로 제3지대라고 할 수 있는 진영이 꽃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드시 민주당 왼편에서 진보를 표방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당명에 담아서 좀 더 명확하게 선택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도 실험은 이도저도 아닌 양비론만 내세우다가 망했다.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당명이 당의 지향을 못 보여줬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다 떠나서 입에 안 붙는다. 시간이 지나도 안 익숙해질 것 같다. 약칭을 뭐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국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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