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호호 (家家戶戶)술 빚는 문화...다양한 가양주 등장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지역별 명주 속속 등장
가양주 문화와 주막문화...1916년 주세령으로 자취 감춰

최근들어 전통주에 관심을 두고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류시장에 출시되는 우리술이라고 불리우는 전통주들은 다양한 스타일로 변화를 주면서 애주가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특히 우리술은 단순히 전통만 고집하거나 ‘오래된 것’만을 두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전통주를 지키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이번 시간은 제 1편 우리술의 탄생과 발전에 이어 우리술의 역사 두번째 시간으로 우리술의 전성기와 암흑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중앙뉴스>는 윤경옥 소믈리에(Sommelier)가 알려주는 '와인'이야기에 이어 윤경옥의 전통주이야기도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전통주 소믈리에 자격증 소유자인 윤경옥 전통주 소믈리에(Sommelier)는 (사)한국소믈리에협회 와인강사이자 식음료협회 와인 Sommelier 심사위원이다.

윤경옥 전통주 소믈리에(Sommelier
윤경옥 전통주 소믈리에(Sommelier

이번 시간에는 우리 술의 역사 이야기 1탄 '탄생과 발전'에 이어 두번째 시간으로 우리술의 전성기와 암흑기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술은 고려시대에 탁주, 약주, 소주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완성되었고 술 만드는 기술이 점차 발전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문화가 찬란히 빛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고려시대 사찰에서 대규모로 생산되어 거래되었던 우리술이 일반 가정에서 직접 술을 빚어 제례에서 사용되거나 객 맞이용으로 음용되었는데 고려시대보다 술 빚는 양은 점차 줄었지만 그 재료가 멥쌀에서 찹쌀로 사용 비중이 높아지면서 감칠맛이 뛰어난 술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술밑을 사용하여 효모를 증식시키는 기법이 발전되어 밑술에 덧술 하는 과정이 추가되면서 더 높은 알코올 도수와 진항 풍미의 술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렇게 가가호호 (家家戶戶)술을 빚는 문화는 그 집안과 가문의 특색을 담고 있었고, 한국의 가양주는 수만 가지의 다양성을 갖게 되었다. 또한 소주도 날이 갈수록 소비가 늘어나게 되면서 '다산 정약용'은 전국의 소주고리를 거두어서 식량난을 예방하자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술들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1670년에 '음식디미방'에는 서양의 쉐리 Sherry Wine나 포트와인 Port Wine처럼 술을 빚는 과정에서 발효가 진행 중인 술에 증류주를 첨가하여 함께 발효시키는 '과하주'가 등장한다.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훌륭한 제조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가양주뿐 만 아니라, 유교의 영향으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지역별 명주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전통주는 약 400여 종으로 문헌에 기록되지 못한 술까지 합한다면 아마도 1000여 종의 전통주가 만들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손에 꼽히는 명주로는 △감홍로, △죽력고, △이강고와 같은 소주와 더불어서 과하주를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술로는 감홍로, 죽력고, 이강고와 같은 소주와 △합주류 및 △과하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조선시대의 명주들은 지금까지 명백을 이어내려 오면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양주를 접한 건 언제였을까?

바로 신미양요(1871년) 당시 이양선이었던 콜로라도호를 점검하기 위해 승선한 관리 김진성과 통역관이 서양의 술을 최초로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내셔널지오그래피의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술 박물관 전시내용 中
대한민국 술 박물관 전시내용 中

'5월 30일 아시아 함대로 작약도와 율도 사이에 정박했다. 몇몇 조선사람들이..(생략).. 배를 두루 구경하고 식사와 술을 들자..(생략).. 이때 귀중한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05년 우리 민족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우리의 전통주에 손을 대고 모든 술에 세금을 메기기 시작했다. 1909년 최초의 주세법이 시행된 후 1916년 더욱 강화된 주세령을 반포했다.

이 주세령으로 자가에서 술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고 면허가 있는 사람에 한해서 술의 제조가 허가되었으며, 이 면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었을 경우, 그 상속인이 절대로 주류를 제조할 수 없었다. 이를 위반할 경우 2천 원 이하의 벌금에 처했는데,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0원가량이었으므로 이 벌금은 가희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점차 집에서 술 빚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면서 우리의 가양주 문화와 주막문화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어둠으로 사라졌다. 약 40여 년 간의 시간이었지만 우리 술의 문화는 대부분 명맥이 끊기게 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오랜 기간 우리의 전통주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통주는 '밀주'라는 방식으로 꿋꿋이 명백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여기까지 우리 술의 역사(2탄)의 두번째 이야기인 우리술의 '전성기와 암흑기'에 대한 우리술의 역사다. 다음 세번째 이야기는 우리 술 이야기(3탄) 마지막 편으로 우리술의 '정체기와 부흥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