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장수
노오란 배추꽃이
맑은 얼굴로
일렁대는 동구 밖
전쟁이 버리고 간
기둥 같은 사내
열병 앓다 일선 오후
짤각짤각
쇳소리
진달래 밭
민들레 둑
홍송 궤짝은
새하얀 엿가락에
침이 질질
흐르는 대낮
아버지 입던 옷
걷어 내가 바꾼 엿
수수엿 울릉도 호박엿
누구든지 헌것이면
엿가락 준다
짤각짤각
어허 떠난다
[중앙뉴스=이재인] 우리들이 어디에서 많이 들어 본 구전 엿장수가락이다. 멀리서 이 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엄마가 쓰던 비녀, 제사상에 쓰던 놋양푼에서 헌 신발짝까지 들고 나왔다.
착한 아저씨가 6.25 전쟁을 지나고 상이군인이 되어, 마음에 둔 아가씨네 마당에서 엿장수 타령인가 인심 풍자인가 엿가위를 낙엽처럼 쏟아내던 꼭 그 가을날 같다.
이런 날, 마음 한쪽이 잘린 엿장수의 낯익은 음성을 울타리 너머 숨죽이며 귀 기울이던, 어느 누이의 슬픈 모습이 동화처럼 떠오른다. 씻은 무처럼 하이얀 누나, 누나의 가슴 속에는 엿을 파는 사내가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쉬지 않고 여기저기 마을을 돌아다녔고 누이의 가슴에는 사내의 가위소리가 탄알처럼 박혔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기약 앞에, 누이는 얼굴 모를 아가씨와 떠나는 사내의 뒷모습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다. 동구 밖 짤랑 거리는 가위소리 여전해도, 엿장수와 눈 마주친 영자 누나 말고 누가 그 뒷이야기를 알 수 있으랴. 전쟁의 참화, 1950년대 청무우가 웃자라는 동네 마을 마을, 골짜기마다 탄흔에 찢긴 우둠치에는 듬성듬성 마른 버짐처럼 산 등허리가 숭했다.
풍수맥이 바윗덩이에도 가난처럼 매달렸던 우리들 동네에 엿장수는 소금 장수나 박물장수와 같이 마을의 전령사였다.가난한 우리 시대의 흑백사진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사시사철 푸른 하늘 파란들이 나비와 꿀벌을 불러들이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모든 추억과 전설들이 청산의 꽃 속으로 사라진 시대이다. 어찌 그리운 게 엿장수 사내 가위소리 뿐이겠는가?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엿장수에 대해서라면 사실 내 마음대로 눈이 마주쳤던 여인네와의 사연도 궁금하다. 의병처럼 목숨 걸고 핏빛 장미덩굴이 우거진 안마당으로 들어섰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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