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꾸라지
[중앙뉴스=이재인] 두 번째로 비행기를 탔을 때, 평원을 지나 산골로 접어드는 비행기에서 아직 농지 정리를 미치지 아니한 논다랑이 둑이 구불구불 자유형으로 펼쳐진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지구의 갈비뼈처럼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맥. 신기했다.
우리나라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인간이 지닌 기계가 아직은 천봉지기로 불리는 좁고 작은 논 속에 논다랭이들을 점령하지 못한 때였다. 그 논다랭이 둑 밑에는 물이 흐르는 물고랑이 있다.
농민들은 농번기가 끝나면 일손이 한가해진 틈을 타 삼삼오오 논둑 밑 수렁 속에서 미꾸라지를 후볐다. 농민들의 손에 잡힌 토종 미꾸라지들은 살려달라는 듯, 애원하는 듯 온 몸을 비비꼬았다.
그러나 농사일로 바쁜 여름, 농민들은 가을 땀 흘리고 허기진 육신을 달래기 위해, 양철통을 들고 진흙 속을 더듬었다. 이들에게 미꾸라지를 놓아주는 일은 극히 드물다. 방생을 몰라서가 아니다. 내가 몸이 건강해야만 가족의 평화와 단란이 샘솟기 때문이다.
그래도 먹을 만큼만 포획해 미꾸라지를 씻어 목이 긴 항아리에 소금을 뿌리면 미꾸라지는 불같은 따가움에 놀란다. 놈들은 그 동안 내장에 꽁꽁 숨겨진 이물질들도 다 뱉어 놓는다. 이내 부끄러운 밧구레를 드러내 놓고 눈을 감는다. 치열한 삶은 끝이 났다.
손끝이 구성진 아낙네들의 요리가 시작되면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멍석 위로 자리를 옮기고, 그녀들의 따뜻한 요리로 즐거운 만찬을 시작한다. 이윽고 밤하늘에는 늑대별이 어둠을 밀치고 나타난다. 이게 논다랭이 둑 밑에서 생산된 진국 추어탕이다. 어디 남원만이 본가라고 하겠는가.
사라져가고 있는 건 미꾸라지만이 아니다. 논둑 밑에 둠벙도 있다. 시골 동네는 협치가 잘 이루어진다. 신작로 정비, 장마 끝에 길가에 풀베기, 천렵에 망태메기 등등 무엇 하나 네 일, 내 일을 가리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마을 대동(大洞)계라 하기도 한다.
미꾸라지로 고담백을 보충한 농민들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마을 둠벙을 품어 낼 궁리를 한다. 지금 같으면 전기 모터를 이용할 것이지만 30, 40년 전에는 사람마다 세수대야나 빈 페인트 통을 들고 둠벙 여기저기에서 일제히 물을 퍼냈다.
둠벙이 바닥을 드러낼 쯤에는 은빛으로 번득이는 참붕어와 찹쌀 방게가 오밀조밀 큰일이 닥쳤다는 듯이 부산을 띄는 것을 볼 수 있다. 덩달아 마을 사람들의 손길도 부산스러워 진다. 둠벙물이 고이면 맨손으로 물고기를 덮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새끼는 다 놓아줘! 놓아주어야 내년에 굶지 않지!”
그렇다. 씨, 종자가 남아야만 내년도, 미래도 있다. 포획에도 신사도가 있다는 것. 은빛 참붕어와 찹쌀 방게에게도 생존권은 있다. 어디 이것들 뿐이겠는가.
가수 이선희가 불러 더 익숙한 동요 '오빠 생각'에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지(…)라는 가사가 있다. 농촌에서 모내기를 위하여 묘판(모내기를 위해 모판에 벼 종자 씨를 심는 것)이 한 뼘쯤 자랄 즈음이면 숲이 막 우거지기 시작한다.
뜸부기도 이즈음 성글게 집을 짓는 작업을 하는데 기껏 심어놓은 묘판의 이파리를 이 녀석들이 뜯어가기 일쑤였다. 일 년 식량은 묘판 농사가 중요한데 뜸부기가 망치게 되면 큰일이다. 이런 경우, 농민들은 “뜸부기 알 주워다 불에 구워먹으면 큰 부자 된다구 허데……”
그렇다. 선의의 거짓말이 통하던 시대. 지금은 뜸부기 알은 고사하고 ‘참새 알 먹으면 하늘을 넘어 북한 금강산엘 간다’는 거짓말조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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