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장독대는 신성한 곳이다. 그래서 농경시대 농민들은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다가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통해 국태민안과 가정의 평화를 빌었고, 신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길 희망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제사터였다.

제사는 마을 풍악대의 사물(四物) 연주로 시작되었는데,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신년을 축복하곤 했다. 그런데 이 기도처가 이제는 사라지고 있다.

문명화된 인간, 사회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다 보니 내 손으로 정성껏 담그는 된장, 고추장이 장유업체로 탈바꿈 한 지가 오래 전 이야기이다. 우리 조상님들,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 우리의 며느리들은 수천 년 동안 된장, 고추장을 담갔다.

 우리의 장이 발효 식품, 장수‧건강식품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장독대를 집 안의 양지 바른 곳에, 평평하고 안정된 곳에 두곤 했다. 이 장소가 일종의 성역이었다. 이 성역은 장독대를 높여 햇볕과 바람과 달빛이 잘 드는 곳에 정했다. 주변이 정갈해야 태양신도 달신도 바람신도 맛을 데리고 축복하러 온다고 믿었다.

일종의 애니미즘, 토테미즘으로 치부하고 지나칠 수 도 있지만, 또 다른 눈으로 보면 이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민속’이기도 하다.된장의 역사는 콩과 함께 한다. 된장, 고추장의 역사는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고 중국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고추장 역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보고서에 잘 기재되어 있는데, 1800년 전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고추장의 명칭과 조리법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동의보감에도 약고추장 담그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 290년 경 정 삼국지 중 “동이족(고구려인)이 장 담그는 솜씨가 훌륭하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최승로의 건의문(문종3년, 1049년) 개성에 흉년이 들어 백성을 규제하기 위하여 된장을 배급한 기록도 있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장 담그는 방법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장유 발달사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이고 할머니, 어머니들의 생활사이다.

된장, 고추장을 담그는 용기도 무척이나 중요했는데, 숨 쉬는 장독(옹기)가 필요했다. 산 속에 들어가 옹기를 굽는 옹기장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옹기점은 인기가 좋았다. 조선시대에 서양 선교사들이 대거 유입되던 시기, 종교(천주교) 탄압으로 갈 곳이 없었던 그들은, 신자들과 산 속에 들어가 질 좋은 옹기를 만들어 팔았고, 그것이 우리의 옹기 역사가 되었다.

그들은 인류를 위한 전통 옹기, 숨 쉬는 장독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옹기는 장을 담는 용도 뿐 아니라, 벼나 곡식을 담는 용기로도 사용되었고, 물류의 중심이 되었던 인천을 비롯해, 곳곳에 ‘독쟁이’라는 지명이 등장했다. 이처럼 장독은 장유의 역사이고 콩의 역사이며 천주교도들의 슬픈 역사이기도하다.

“장은 오래 묶어야 그 맛이 좋다.” 이 표현은 세월의 기다림이 깃든 것이어야만 그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다. 장이 익어가는 산촌에는 기다림이 있고, 천연의 자연이 오롯이 숨 쉰다. 장에는 맑은 물과 햇볕과 솔바람과 양광(陽光)까지 더해져 그 맛이 유일하다.

그래서 가재가 있고 도롱뇽, 반딧불이 반짝이는 산촌의 장유는 천하 일미이다. 장독대, 이는 가벼운 이름이 아니다. 방문을 열자 선뜻 장독대가 눈 안에 가득 찬다. 눈 덮인 장독대의 풍경 또한 신이 쓴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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