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고개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시골 마을에 가면 요로를 관통하는 고개가 있다. 고개마다 이름이 있었고, 세대가 바뀌고 사람이 떠나도 고개 이름은 지속되고 전통으로 이어졌다. 이 고개 이름도 이제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람이 나다니던 큰 고개 밑에 중장비를 동원하여 터널을 뚫고, 자동차로 고개를 관통하는 편리한 시대가 왔기 때문인가.

아리랑 고개, 서낭당 고개, 사 고개, 달래 고개, 마구형 고개, 주막 고개, 쭈꾸미 고개, 비봉 고개 등등 많은 고개들이 사라졌지만, 그 중에서도 염치 고개(소금 장수 고개) 이야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옛 어른들 속담에 “죽어도 소금 한 됫박”이란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살림살이가 제아무리 옹색해도 소금 됫박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금의 짠 맛을 보면서 인생사 삶을 부패하지 않도록 맛을 내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세상사 다스리는 소금처럼 간을 맞추면서 살라는 의미가 바로 소금이 지닌 중의이다.

옛날 소금 장수는 바닷가 염전에서 소금을 볏가마에 담아 지게에 걸쳐 얹혔다. 사내는 그 무거운 소금을 지고 후미진 골짜기를 지나고 험한 고개를 넘었다. 땀이 온 몸을 적셨고, 숨이 가빠왔다. 그렇게 수수 심고 조 심는 두메까지, 소금 장수는 사람이 사는 동네면 어디든 찾아갔다.

소금 장수의 구성진 구령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바구니, 바가지, 가마니 할 것 없이 농산물을 담아 가지고 나왔다. 농산물은 일종의 화폐였기에, 동네 사람들은 이를 소금과 맞바꾸어 갔다. 더불어 수백 년도 더 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고 간 농산물과 소금은 돈으로는 살 수 없었던 정도 담겨 있었다.

그 당시 소금을 운반하는 도구로는 지게가 유일했다. 지게는 소금 장수와 더불어 개울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소금 장수는 소금 뿐 아니라 이 마을, 저 동네 소식 또한 지고 나르던 전령이었다. 그는 바깥 소식을 전하는 뉴스통이자, 신문 수송자, 마을의 메신저였다.

이 깜깜한 마을에 바깥 세상에 돌아가는 물정을 이 잡듯 전해주는 이가 소금 장수였다. 그런데 교통이 발달하고 험한 산허리에 터널이 뚫리면서, 소금 장수의 발길도 끊어졌다. 아울러 소금 장수가 앉아 쉬던 염치고개, 혹은 땀의 고개도 사라졌다.

소금 고개에 얽힌 설화도 흥미진진했다. ‘길례’라는 아씨의 용모와 자태를 과장 섞인 묘사로 줄줄이 늘어놓을라치면, 총각들은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듣곤 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살결이 박 속 같고 댕기 머리가 치렁치렁한 아가씨……. 사랑방에서 새끼 꼬던 머슴들도 군침을 흘리며 엿 듣던 염 서방과 길례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인기였다.

소금 장수, 옛날 기생들도 은쟁이 돈 서방보다 소금 장수를 반겼다던 그들의 쉼터, 염치고개는 사라졌다. 그 산허리에는 씽씽 자동차 달리는 소리만 들릴 뿐, 아련한 소금 장수의 구령 소리가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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