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금) 오전 10시, 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려

1919년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구 서울역 광장)에서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민의 자주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왈우(曰遇) 강우규의사 의거 92주년 기념식 및 동상제막식』이 2일(금) 오전 10시 의거 현장인 구 서울역 광장에서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우무석 국가보훈처 차장, 나경원·진영 국회의원, 박유철 광복회장, 기념사업회원, 일반시민, 오산고등학교학생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업회장의 인사말, 국가보훈처 차장·광복회장의 축사, 오산고등학교 학생대표의 ‘의사님께 드리는 글’에 이어 동상제막 순으로 진행되었다

강우규의사(1855.7.14~1920.11.29)는 평남 덕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 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 길림,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를 편답(遍踏)하고 길림성 요하현(遼河縣)에 동광(東光)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통한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1919년 국내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만주, 노령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참가하여 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시킬 계획을 품고 폭탄을 구입, 허형(許炯)과 같이 원산을 거쳐 8월 5일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신임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의 사진과 부임정보를 입수하였고,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에 나가 신임 총독 일행이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투척하였다. 일경 말홍우삼랑(末弘又三郞)이 절명하는 등 37명이 부상하였으나, 재등실(齋藤實) 신임 총독 폭살에는 실패하였다.



비록 재등실(齋藤實) 신임 총독 폭살에는 실패하였으나, 한일합방이 한국민이 원해서 이루어 진것이라고 세계 여론을 기만하던 일제의  흉계를 전세계에 폭로하였으며, 한국민의 자주독립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케 하였다.

이 후 9월 17일 사직동에서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피체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될 때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이라 말씀하시고 순국하신 마지막 순간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으셨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