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얼굴을 보며 힘든 여정을 빗대어 ‘안중근 장군 보다 더하랴?‘ "
 
▲ 하얼빈 역사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박선협 취재진 대표기자]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회장과 취재진은 지난 14일 오후 하얼빈 공항에 내렸다.
만나봐야 알것 같은 단순한 생각하나 꾸려 담고 나선 길이었다.
들은 풍월인 세세한 역사의 흔적일랑 깡그리 잊자 했다.
모두 남들에게 주어들은 것일 터이고 大기자 또한 다분히 거기에 길들여진 모습일 것이란 지례짐작을 털자했다.

한(一) 사람(人)의 합성인  大기자의 눈과 생각과 느낌이 무에 별 볼일 있을까싶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것이 조금은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달고 나섰다.
하얼빈 하늘은 초가을을 연상케 했다.
청청한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녔다. 누군가 말했다.
"나~참, 흙먼지 자욱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구먼, 이건 마치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 같쟎아...."

정해진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일행은 먼저 하얼빈 역을 답시키로 했다.
바로 그곳이다.
취재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안중근장군의 육혈포가 작렬한 그 현장을 보지 않고서 다른 무엇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무리무리 늘어서거나 앉거나 지나가거나 팔거나 사거나 하는 세상 어느 곳의 역전풍경처럼 하얼빈역이라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공안의 심한 태클이 가로막았다.
침략자요 적괴수인 이등박문은, 대한남아요 민족적 기상으로 안중근 장군의 의해 한방에 날아간 목숨.
이등박문이 쓰러진 자리 그리고 우리의 영웅 안중근장군이 매섭게 쏘아보며 민족의 한을 풀던 자리엔 놋쇄표지판이 그 날을 증언하고 있었다.

동서남북 돌아보며 기록사진 셔터를 누르느라 이석우 촬영팀장은 비지땀을 흘렸다.
손짓발짓으로 하얼빈역 풍경을 조각해 내려고 군중을 헤치고 다닌 조장훈 수석기자의 눈빛이 사뭇 빛나고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일행은, 업무를 분담키로 하고 정한 것이 촬영의 명인인 李기자를 '감독', 기획과 정보분석 등에 일가견을 가진 국내외송신담당기자를 '수석'이라 불렀다.


▲ 안중근장군상 보존장소인  JS 인터네셔널 지하사무실에서 공동취재팀 박선협, 이석우 기자  이진학회장(좌에서 네번째), 정광일회장, 이복재 인언협회장, 조장훈 기자 순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이어 이진학李振學사장(안중근장군동상건립위원장)의 JH International 백화정 현장(하얼빈 차 없는 거리)으로 이동, 예의 안장군 동상이 안치된 장면을 목격키로 했다.
본격적인 이동작업이 벌어지기 전의 모습을 그렇게 볼 수가 있었다.
3년전 그러니까 '06년 제작을 완료하고 건립을 마치자 중국당국의 철거명령으로 불과 11일만에 자신이 운영하는 백화점지하인 이 회장 사무실 한켠으로 이동, 지난 3년간을 지켜온 바로 그 동상이 거기 있었다.
장군의 동상은 말없이 서 있었다.

비서에 의해 매일아침저녁으로 깨끗한 손수건 몇 장으로 얼굴과 전신을 닦아드렸다는 정성이 말해주듯 비록 청동이라곤 하지만 생기가 흐르는 실상인양 피부에 와 느낄 정도의 감각이 도는 듯 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장군의 동상이 옮겨지기 시작한다.
8.15 광복절을 맞아 0시로 잡았다.
여나문명 인부들이 '이~얼~산(하나-둘-셋)‘ 구령에 맞춰 1톤 남짓한 동상이 지하 2층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李감독의 방송용 카메라와 조 수석의 셔터가 라이트에 따라 앵글을 잡기 시작했다.

원목으로 받침 둥글레를 대고 그 위에다 담요를 깐 뒤 끌고 밀고 당기며 한 시간 가까운 진동의 몸부림 끝에 지상에 올랐다.
▲ 안중근 동상을 운송하기 위해 나무상자를 이용해 보호하고 있는 모습.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이동에 맞게 동상케이스를 제작한 주홍빈周洪濱씨의 날렵한 솜씨가 뚝딱뚝딱 꿰맞춰지기까지 취재팀의 취재는 열불이 붙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예당TV"가 2시간용 특집 콘티를 찍기 위해서라면서 카메라 후레쉬를 밝혔다.
예상했던 한국의 공중파방송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
취재팀은 호텔로 들어와 국내 방송사에 자료와 기사를 송고키 위해 밤을 하얗게 샜다.
서버버전이 영~ 말이 아니었다.
한 컷을 보내는데도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다.
편집에서 송고에 이르기 까지 무엇 하나 손쉬운 것이 없었다.
YTN과 KBS에서 이복재 협회장께 전화를 걸어왔다.
편집은 감독이 맡고 기사와 방송사 송신담당은 수석이 맡았다.
로밍으로 국제요금이 장난이 아닐텐데 협회장과 수석의 전화기는 쉴 틈이 없었다.
(후일담이지만, 귀국해서 알아보니 협회장은 20여만원, 조 수석은 40여만원이나 나왔단다)
조 수석은 기사를 쓰고  이 감독은 영상을 편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YTN의 라인을 잡은 것이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 2시경, 아침 6시 1분용 영상을 웹하드에 송출하는데 1시간 20분이나 소요 되었다.

반드시 '인언협'의 자막처리를 전제로 송고한 것이었다.
나중 안 일이지만 YTN은 이 기본적인 약속을 어긴 꼴로 한국전역에 내 보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결국 협회장에게 심심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한다는 선에서 지나갔다.

뉴스의 벨류란 첫 머리를 누가 어떻게 장식하느냐가 생명이다.
특종을 터뜨리기가 그래서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고 기자평생 한번 누리기도 하늘에 별따기 만큼 어렵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 아닌가? 
한바탕 법석이 건너 뛴 뒤에야 KBS, MBC, SBS가 사진 한 장 달라고 난리가 아니라는 소식들이 난무했으나 버스 지난 뒤 손들기로 보아 넘겼다.

'인언협'창에 제1신을 올려놓고 우리는 심양을 향했다.
15일이다.
한 수 詩를 지어 헌정했다. 새길을 재촉했다. 100년전 안장군이 고난의 행군을 이은 바로 그 길에 오른다.


▲ 안 장군이 서 있던 자리로 여기서 이등박문을 향해 민족의 총탄을 날렸다. 뜻 있는 인사들이 흑룡강성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 중국 정부가 흔적을 표시해 주었다.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 당시를 기념하기라 위해 열차가 그 자리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안중근 장군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진학 회장.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


빛나는 여명

안중근장군의

동상이 거기 있었다.

민족의 영웅이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하얼빈 하늘에서

100년을 살아온 장군

그가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목숨을

산화시킨 의거의 현장엔

어디나

가슴을 치는

진혼곡이 울린다

어느 이름모를 살아 숨쉬는 자의

기도가 서리거나

십시일반의 정성손길이 탑을 이룬다



그러나

안중근!

그 이름이 불구덩 속으로 뛰어들어

육혈포를 내갈긴 현장 하얼빈엔

그런 자취가 없다



천인공로할

한겨레 침탈

뻔뻔하게도 양두구육으로 위장한

일제의 원흉 이등방문

이름하여 이또히로부미의

심장을

찢어발긴 하얼빈 현장엔

무엇하나 세울 수 없어

지하에서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안중근잗군의

그 혼백이

지금

역사를 뛰어넘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머언길

기나긴 노정을 뒤로하고

하얼빈을 떠난다



(중략)



세월이 흘러도 남는 것은 남는다

기억해야 함을 기억하게 된다

별이 스러진 현장에서

안중근 장군은

새로운 큰 별이되어

안착영면의 길에 오른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이 품을 향한다

'독립된 조국에 묻어다오'

몸은 사라졌으나

정신으로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평화의 노정이 어떤 것인가를

그 진면목을 일깨우기 위해

돌아온다

빛나는 여명이 거기서 돌아온다



 1,150 Km 라면 서울에서 부산을 두번 왕복할 거리다.
그 중간지점이 심양이다. 마이크로버스에 몸을 실은 일행은 모두 일곱이었다.
중국인이 운전했는데 말도 통하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 고속도로상 폭염 속에서 30분 남짓 발만 동동구르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키 위해 짐을 챙겨 걸어가는 모습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호사다마란 어디서나 생기는 일일까?
하얼빈서 5시간여를 달리다 그만 작열하는 태양에 잠을 자기라도 하려는 듯 취재애마는 움직일 줄 몰랐다.
심양을 불과 100여 키로 남겨둔 고속도로 상에서 마이크로 버스 엔진이 멈추고 말았다.
땡볕 속에서 좌왕우와 했다.
35도의 고속도로 상에서 30분 넘게 땀만 흘리고 발만 동동굴렀다.

결국 고속도로를 벗어나 버스로 심양까지 가자고 결정하여, 취재 가방과 개인의 짐들을 낑낑거리며 숲을 헤치며 마을을 다니는 버스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먼저 간 이진학 회장이 버스를 잡고 300여미터에서 뒤따르던 취재진에게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허나 취재진은 무거운 짐보따리를 들고 빨리 뛸수가 없었다.

버스 운전기사와 차장은 빨리 안 온다고 빵빵~ 울려대고, 우리 일행은 열심히 뛴다고는 하지만, 군대 각개전투장에서처럼 박박 기듯이 달려가 다행히 버스에 올랐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취재진과 이진학 동상거립위원장, 정광일 안중근청년아카데미대표, 이복재 협회장은 서로 얼굴을 보며 힘든 여정을 빗대어 ‘안중근 장군 보다 더하랴?‘ 고 웃어 넘겼다.

가까스로 완행버스에 올라 사평沙平까지 가는데, 이 버스는 마을마다 들리며 가는 차라 3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사평터미널에 도착해 다시 심양으로 가는 정기 노선버스에 옮겨 탔다.

▲ 심양에 도착 현지 태권도단과 마중나온 유지들과의 기념촬영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심양은 저녁 일곱시가 다 되어서야 닿았다.
마중 나온 현지 동포들과 안중근장군동상 영송행사를 치렀다.
한인회와 태권도 팀이 안장군의 기상을 기리며 대형 태극기자락에 사인을 실었다. 
이 태극기는 뒷날 안장군동상이 국내에 안착하고 건립지에 세워지는 과정에서 희망자의 사인으로 흑-백-청-홍의 사인색갈이 선연하게 완성된 태극기가 되어 영구 보관케 된다고 한다.

이날 1시간여의 취재가 끝난 후 이 단체 이창렬 회장 사무실에 가서 기사와 영상 작업에 들어갔다.
잠은 차량을 이동하면서 조금씩 자는 수밖에 없었다
16일 오전 10시 심양을 떠난 동상이 대련을 거쳐 여순에 이른 것은 오후 5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여순에 도착해서도 차량은 여순지방법원을 찾지 못하고 시내를 6차례나 빙빙 돌다가 오후 6시경 무사히 도착했다.
국민성금 18억여원이 합쳐져 건물만 구입하여 기념재단으로 관리하고 있는 당시 여순지방법원.
지금은 대형병원의 정문위치를 점하고 있는 곳 안뜰에 안장군의 동상이 무사히 내려졌다. 재빨리 카메라의 李감독과 조 수석의 발이 움직였다.
2층으로 된 독립투사들의 재판정, 기타 고문도구, 재판장 서기가 쓰던 방, 대법정, 자료실등을 두루 돌아 담았다.

오는 10월이면 이곳 여순 감옥에서 안중근청년아카데미와 중국현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가신 분을 기리는 모임이 합동으로 '안중근모의재판'을 연다고 정회장이 귀뜸해 줬다.
그는 "만고역적 일제의 만행과 이등박문의 죄상을 낱낱히 공박하고 세계여론 앞에서 영웅으로 산화한 일등방문 안중근장군이 끝내 무죄판결을 받아내는 세기의 재판이 될 것"이라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역사적재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련의 안 장군 동상 귀국 노정에는 정신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정성이 기울여 졌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움을 자아내게 했다. 
그 중심에 이진학 회장이 서 있다.
그의 개인적인 헌신후원이 오늘을 있게 만들었다.
한마디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저는 안중근장군의 위업을 늘 존경해 왔습니다. 제가 중국 땅 하얼빈에 둥지를 튼 것이 계기가 돼, 안장군을 비롯 12분의 애국선열들이 단지斷指동맹을 맺고 이등박문을 척살한 사실에 감동 사재를 털게 된 것입니다. 중국유명조각가에게 청해서 동상제작에 3년 그리고 보관에 3년을 보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제 평생의 소망이 담긴 것입니다.
다행이 조국청년들의 열성에 감동 청년아카데미와 손잡고 고국으로 보내게 된 것을 감개무량하게 생각합니다. 부디 온국민의 정성이 모아져 12개의 동상이 제작되고 전국에 세워져 길이 안중근장군의 평화사랑 나라사랑 겨레사랑이 이어지길 빌고 바랄 뿐입니다."
말끝을 맺는 그의 눈가에 한 방울 물기가 스쳤다.

노제를 지냈다.
제사 사회는 김진원 단체 상임지도위원이 맡았다. 그 분야의 전문가였다.
미리 준비된 귤-수박-대추- 술- 양초-민속주인 안동소주 등이 올려졌다.
향불을 붙였다.
모락모락 오르는 연기 속으로 안장군의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정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안중근 단체와 협회 취재진이 제례에 참석해 의식 행사를 치렀다.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깔아놓은 자리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각각 옷깃을 여몄다.
정성 깃든 인사와 술잔을 바쳤다.
묵념을 드렸다.
어디서 모여왔는지 꾸역꾸역 몰려든 중국인 구경꾼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이 일행의 뒤통수에 와 꽂히고 있었다.
안중근장군상은 이렇게 여순에서 몇 일을 머문 뒤 오는 9월초하루 황해를 건너 귀환한다.
남은 일은 장군의 혼인 동상을 맞을 차비를 해야 한다.
어느새 취재진과 단체 일행은 장군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역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 성 맞게 대한 얼 올라선 뒤에라야

중 차대 만만한 짐 부려놓고 쉬려나

근 황을 뉘 묻지마라 겨레맘 속 알리라


삼행시조 한 수를 바치려니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목메인 노래가 터졌다.
'선구자'였다.
여순 저문 하늘 속으로 날았다. 울려 퍼졌다


▲ 당시 안중근 장군이 재판을 받았던 법정 안.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그동안 취재진의 취재열기로 맡은바 소임을 다하느라 잠 못이루는 밤 등은 협회장의 국내 언론사에 대해 다각적인 노력으로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니, 힘든 여정이 봄 눈 녹듯 사르르~ 가벼워 졌다.


▲ 일제식민지당시 여순지방법원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