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의 날, 순국선열·애국지사 75명 포상
순국선열의 날, 순국선열·애국지사 75명 포상
  • 박광원 기자
  • 승인 2011.11.1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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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34명·건국포장 17명·대통령표창 24명
국가보훈처는 11월17일 ‘제72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1919년 3월 평남 대동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은 차병규 선생을 비롯해 75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4명(애국장 8, 애족장 26), 건국포장 17명, 대통령표창 24명으로서 이 가운데 생존자는 1명이며, 여성은 없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 등을 찾아 분석·검토하고, 현지조사를 통해 동일인 여부와 활동 전후의 행적을 확인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해 독립유공자를 포상하게 됐다.

특히 이번 포상자 중 12명은 판결문 등 입증자료를 통해 공적내용을 발굴한 후 다시 읍·면·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 가족관계등록부 등을 역 추적해 유족을 찾아 포상함으로써 후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805명, 애국장 3797명, 애족장 4743명, 건국포장 951명, 대통령표창 2355명 등 총 1만2774명에 이른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등과 기존의 사료 수집 공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해외 사료수집위원들의 협력 하에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원 등과도 긴밀히 협조해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을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제72회 순국선열의 날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 ‘3인의 의병 결사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이행순 선생

1908년 음력 12월 전남 나주에서 권택(權澤, 1990년 애국장) 의진(義陣) 소속으로 밀정을 처단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받은 이행순(李行順)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의병장 권택의 지휘 하에 동지 곽재구(郭在九), 박응천(朴應天)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일경(日警)에 밀고하던 이순흥(李順興)과 김봉오(金奉五)를 처단하여 의진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으로 이미 포상을 받은 곽재구(1990, 애국장), 박응천(2001, 애국장) 등 ‘3인의 의병 결사대’로 맹위를 떨쳤던 분들이 모두 포상이 되었다.

▶ 독립만세 시위 무력탄압에 맞서 투쟁하다 중형을 받은 차병규 선생

1919년 3월 4일 평남 대동군 금제면과 강서군 사천시장(沙川市場) 일대에서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의 무력 탄압에 맞서 처절하게 투쟁을 이끌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차병규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처음 선생은 대동군 금제면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동지들과 협의, 인근 지역으로 시위를 확산시키기로 하고 강서군 사천시장으로 이동하여 대대적으로 만세투쟁을 이끌었다.

 대동군 금제면과 강서군 사천시장 시위는 수만 명이 참가함으로써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3ㆍ1 독립만세 시위 가운데 거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이에 놀란 일제가 다수의 무장헌병을 동원해 발포함으로써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중경상자도 40여 명에 이르는 참극을 연출, 독립전쟁을 방불케 했다.

▶ 엄혹한 시기에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을 도모한 김병화 선생

1940년 9월 이후 전북 전주에서 동지들과 함께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민족의 실력양성 방안을 협의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김병화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보통학교를 나와 전북 전주와 만주국 영안현 등지에서 행정대서 보조원, 상점 점원으로 전전하면서 일제의 민족차별의 실상을 뼈저리게 느끼고 『조광(朝光)』,『삼천리(三千里)』등의 한글잡지를 읽고 조선의 독립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깨달아,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제 말기의 엄혹한 탄압을 뚫고 비밀리에 조선독립 방안을 위한 협의를 계속하였다.

그의 포상은 생활 속에서 일제의 잔혹한 조선민족 멸시와 차별을 겪은 식민지의 한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독립운동 전선의 투사로 성장해갔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조직 확대의 숨은 공로자 이원열 선생

1919년 5월 중국 상해에서 독립신문 사원,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남 하동군 조사원으로 활동하고 1921년 3월 귀국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이원열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의 포상은 독립운동 공적과 함께『중외일보』(1928.6.18.)에서 사망 사실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1919년 5월 선생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400원의 자금을 마련,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와 북경 등지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원과 임시정부 경남 하동군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선생은 충청남북도 및 전라남북도에 임시정부 연통제 교통사무국을 설치하고자 교통부 차장 김철(金徹 : 1962, 독립장)과 여러 차례 협의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조직 확대에 기여한 숨은 공로자이다.

▶ ‘일본군 군속’ 신분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투쟁을 벌인 이상문 선생

1944년 12월경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연합군 포로 감시요원인 일본군 군속으로 근무하면서 조선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고 탈출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고 6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른 이상문 선생에게 건국포장이 수여된다.

고려독립청년당은 광복 직전에 점령지역인 인도네시아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한국인 군속들에 의해 극비리에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선생의 투쟁은 일제의 점령 하에 한국인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한국독립운동의 무대가 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일한 생존자인 이상문 선생 외에, 이억관(李億觀 : 건국훈장 애족장), 김현재(金賢宰)ㆍ문학선(文學善)ㆍ박창원(朴昶遠)ㆍ임헌근(林憲根)ㆍ조규홍(曺圭鴻 : 이상 건국포장) 선생 등이 동일한 활동으로 이번에 포상을 받음으로써 한국독립운동사의 영역은 동남아시아지역까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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