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TPP 참가 선언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외교적 충돌 가능성이 더 높아진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역내 협력이 중요해졌다는 점에서 우리 역시 중국의 정책 변화에 주의 깊게 대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1월 13일, 미국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Trans-Pacific Partnership) 참가 의사를 밝힘에 따라 그 성공 가능성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FTA 환경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TPP를 둘러싼 각국의 속내는 사뭇 달라

일본의 참가 선언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Trans-Pacific Partnership)은 미국의 동아시아 통상정책과 관련해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변수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2005년 모습을 드러낸 TPP는 2009년 초까지만 해도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소규모 경제통합체에 불과했으나 미국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중요성이 급격히 커졌기 때문이다.

본래 TPP는 태평양의 동쪽과 서쪽, 남쪽에 위치한 브루나이, 뉴질랜드, 칠레, 싱가포르 등 4개국이 각국의 상이한 경제적 부존 상황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경제통합체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인접 국가들에 비해 작은 경제규모와 석유/천연가스, 농축산업, 구리, 서비스업 등 특정 부문에 과도하게 집중된 산업구조가 개별 국가 입장에서는 약점이지만 4개국이 하나의 ‘경제통합’ 단위로 묶이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TPP는 이처럼 소박한 동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미국의 경제적, 외교적 필요와 잘 맞아 떨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미 무역대표부(USTR)의 론 커크 대표는 2009년 취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TPP가 미국경제의 새로운 성장 엔진이자 유망 시장임을 강조했고, 오바마 대통령 역시 TPP가 ‘아태지역 경제 통합에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자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과 미국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한국과 일본, 말레이시아 등 이 지역 정상들에게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미국이 TPP의 세력 확장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중추로 빠르게 떠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지난 20여 년 간 미국이 공을 들여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가 이 지역의 시장 통합과 무역 및 투자 자유화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1개 회원국이라는 큰 조직에 얽매여 몸집이 둔해진 APEC의 뒤를 이어 미국 중심의 자유화를 함께 이끌어갈 이 지역의 ‘유효한’ 대안으로 TPP를 선택했다는 해석이다. 즉, TPP를 키움으로써 중국의 지나친 부상을 견제하는 동시에 중국으로 하여금 WTO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과 제도 개혁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노력을 반영하듯 TPP는 미국뿐 아니라 호주, 페루,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주요 유망국들이 새로운 회원국으로 참여하면서 총 9개국의 경제통합체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전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개국만 참여하던 초기의 0.92%에서 미국, 호주 등 5개국의 25.73%가 더해져 26.65%로 높아졌으며, 교역 비중 역시 2.65%에서 16.87%로 확대됐다. 아울러, 금번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일본과 함께 캐나다와 멕시코까지 동참 의사를 밝힘에 따라 TPP가 환태평양 무역권의 새로운 주축으로 발전해 중국과 EU를 견제할 유용한 카드로 쓰일 가능성 역시 점점 더 커지는 추세이다.

일본 TPP 참가, 내부 개혁 실패 따른 차도지계

한편, 일본의 TPP 참가 선언 배경은 창설 멤버 4개국이나 미국과는 다른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최근 몇 년간 나타난 일본 글로벌 기업들의 잇따른 실패와 올 봄의 3.11 대지진 등을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 경제를 지탱해 온 일본 고유의 ‘시스템’이 예전만큼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 뚜렷한 대안을 못찾자 결국 그 활로를 외부에서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높은 내수시장의 진입 장벽, 갈라파고스 섬처럼 정체된 농업과 제조업의 성장 활력 등 문제점과 원인은 누구나 알지만, 정치적 리더십의 실종과 일본 특유의 폐쇄성으로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TPP와 같은 다자간 경제통합체에 참여해 다소 강제적인 개혁과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의 TPP 참여가 기대했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대내적으로, 한일 FTA나 한중일 FTA 등의 검토 및 추진 과정에서 보여준 통상 당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감안할 때 행정부 내의 개방 의지 역시 별로 강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으며, 수출보다는 내수 비중이 월등히 높은 일본 경제의 구조적 특성상 개방을 기꺼워하지 않는 국내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일반적으로 FTA나 TPP와 같은 자유무역협정 논의는 ‘자원 배분의 효율화’라는 경제적 동기에서 시작하지만, 최종 단계에 가까워질수록 그 나라 국민의 대 정부 신뢰, 즉 정치적 결정의 중요성이 커진다. 대외적으로는 협상 능력, 즉 협상 상대국에 맞서 얼마나 자국의 이익을 잘 챙겨올 것인지에 대한 신뢰가, 대내적으로는 FTA로 이익을 얻거나 피해를 입는 상이한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서 그 이익과 피해를 얼마나 공정하게 재분배 할 것인지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쌓여야 국민들도 안심하고 지지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나 대의기관에 대한 신뢰가 충분치 않은 일본의 TPP 협상은 잡음이 많을 여지가 상당하다.

대외적으로도, 회원국들의 경제 규모 격차가 크지 않아 비교적 합의가 용이했던 초기의 TPP와 달리 미국, 일본 등 거대 경제권들이 참여함에 따라 각 회원국들의 셈법도 훨씬 복잡해져 2013~2015년을 목표로 했던 TPP 발효 시점 역시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일본의 TPP 참여가 꺼져가던 일본 내부 개혁의 불씨를 다소나마 살려 내긴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TPP 전체의 진전 속도는 오히려 한 템포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TPP 확대가 동아시아 FTA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중국이 열쇠

TPP 확대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FTA 환경에 미칠 영향이 정치외교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이 고리를 푸는 열쇠는 중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TPP와 함께 부상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영향력에 대해 중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미 동아시아 지역에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다고는 해도 현 시점에서 TPP를 앞세운 미국과 일본을 배제한 채 나머지 국가들과 독자적인 블록을 형성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물론 당분간은 시장과 생산지로서의 매력도가 큰 중국이 영향력을 유지하겠지만 TPP가 점차 확대되어 한국, ASEAN 등 동아시아 주요국들까지 합류할 경우, TPP 역내에 새로운 시장과 생산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오히려 중국의 입지가 줄어들 가능성마저 점쳐진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형식을 취하되, 중장기적으로는 TPP에 동참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 중심의 경제블록 형성을 가속화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미국 중심의 TPP 확대에 대해 ‘초대받지 못한 것이 다소 불쾌하지만 TPP의 경제통합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된다면 인정하겠다’는 중국의 공식 입장 역시 이와 같은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이 TPP에 함께 참여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중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도 TPP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시장개방과 무역 및 투자 자유화 수준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게 미국 등 기존 TPP 회원국들의 입장이고, 중국 정부 역시 고성장 뒤에 나타나는 정체의 덫에 빠지기 전에 새로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WTO 수준의 개방에도 수십 년이 걸렸던 중국의 과거와 미국식 시장경제의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최근 행보 등을 고려할 때 당분간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중국의 러브 콜, 즉 지금까지 유지해온 ‘ASEAN+3(한, 중, 일)’ 중심의 동아시아 협력 구도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한중 FTA나 한중일 FTA와 같은 역내 경제통합에 더욱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역시 TPP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이와 같은 환경 변화에 우리나라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현재 우리 통상 당국의 입장은 ‘단기간 내에 TPP가 현실화 될 가능성이 낮고, TPP 참가국 대부분과 이미 양자간 FTA를 체결했거나 추진 중이라는 점에서 서두를 필요는 없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분석은 물론 정확하다. 그러나 양자간 FTA와 다자간 FTA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각국에서 생산하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온전히 그 나라 내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차이가 없다. 하지만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확대로 다양한 국적의 중간재가 투입되는 상황에서 다자간 FTA, 특히 TPP처럼 자원, 노동, 기술, 시장 등 다양한 특장점을 보유한 국가들끼리의 경제통합체는 양자간 FTA에 비해 원산지 규정을 충족시키기가 훨씬 유리하다.

결론적으로, TPP 참여의 손익을 섣불리 판단해 동참 가능성을 닫아두기보다는 향후 중국과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에 맞춰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LG경제연구원 김형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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